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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기쁨 Mar 05. 2023

버스도착 안내 어플이 먹통이 되었다

기다림의 낭만




아침 일찍부터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 카카오톡 지도 어플로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몇 분에 도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이제 항상 외출을 할 때마다  습관이 되었다. 그래야 때 맞춰 정류소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절약하고, 가야 할 곳에 제시간에 도착하도록 일찌감치 계획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좀 이상하다. 지도의 버스 도착시간 정보가 '점검'으로 뜬다. 그 어떤 노선도 도착시간이 표시되지 않는다. 갑자기 난감해졌다. 버스가 도착할 시간을 전혀 모른 채 나가야 하다니... 눈앞에서 내가 타야 할 버스를 놓칠 수도 있고,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다음 배차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수도 있을 텐데...

도저히 지금이 나가야 할 최적의 타이밍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마음이 복잡하지만 별 다른 수가 없다.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오늘은 준비를 일찍 마쳤으니 늦게 도착할까 조급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면 정류소의 전광판에서 버스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후에 가장 적당한 노선을 선택하자고 정리를 하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정류소에 도착해 보니, 전광판도 역시 점검이라 표시된 상태다.  토요일이라 점검에 들어갔나...

어플 문제가 아니었구나, 이 부근, 아니면 부산시내 전체 교통정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려야 하다니, 다시 한숨이 나오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불안은 나에게는 익숙한 감정이다.

무엇인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필요 이상으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한다. 미리 계획하고 계획대로 일들이 잘 진행될 때 안정감을 느끼는 나에게 버스 시간 안내 어플은 불안의 접근을 차단하는 신박한 발명품이었는데 이것이 먹통이 되니 막연하고 막막해졌다.


익숙한 일상이 틀어지면서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하는  이 불안함과 마주하며 정류소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내가 왜 이런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끼는지, 그 불편한 불안함은 언제부터 나에게 이리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겨우 10년 정도밖에 안 된 것 같다.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어플과 전광판 서비스가 생긴 것이 말이다.


그전에는 '원래' 버스란 그저 정류소에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오는 대로 타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그렇게 무작정 기다리면서도 하나도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집에서 외출 준비를 할 때 아예 넉넉하게 버스 기다릴 시간을 계산해서 미리 나서고, 평소에 자주 타는 버스는 보통 몇 분을 기다리면 오더라는 감을 믿고 나갔다가 적중하면 기분 좋게 타는 것이고, 어쩌다 생각보다 빨리 버스가 오는 날은 코 앞에서 놓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있는 일들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잘 살았었는데, 언제부터 알고 보면 전혀 불필요한 이 불안함이 나에게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많은 것들이 새롭게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었지만

간혹 그중 어떤 것들은 알게 모르게 예전에 없던 불편한 감정들- 오늘 내가 느낀 불안, 조급함, 초조함 등-도 같이 끼워서 오는 것들도 있는 것 같다.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준다는 것이 모두 생활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과 조급함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었고 최근에 자리 잡은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잘 살기만 했던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이왕 이렇게 된 것, 예전과 같이 ‘버스는 기다리면 오더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렇게 서서 찻길 저 끝에서 점들처럼  다가오는 번호 미상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옛날에 기약 없이 막연히 기다리던 많은 것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을 때, 그때는 이메일도 문자메시지도 전무했을 때니 오직 우체통만 바라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릴 뿐이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답장이 왔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얼른 달려와 우체통을 확인하지만 무수한 고지서 속에 기다리던 편지가 보이지 않을 때의 그 실망감을 '내일은 오겠지' 하는 기대로 바꾸면서 다시 기다림을 선택하던 일, 그렇게 기다림 끝에 편지가 당도하면 편지를 끌어안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던 일들,


남편과 데이트를 했을 때, 만나기로 한 다방에서 약속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어 못 오나 보다 싶어 일어나려 하면 혹시나 내가 나가고 난 뒤에 올 것만 같고,

그래서 다시 앉아 다방 문만 바라보면서 기다리기를 두 시간 넘게 한 끝에 헐레벌떡 달려온 남편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던 일..


그렇게 기약 없이 기다려도 그때는 문제없이 살아졌고, 기약 없음에도 기다리고, 기다리면 바라는 것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게 해 주었는데… 내 계획대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았음에도 지금처럼 불안해 하기보다 마음의 여유가 넘쳤던 그때가 나름 낭만의 시대였던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옛날을 기억하고, 내 마음을 정리하고 보니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동동거리게 하는 불안은 신제품이야, 그리고 기다리면 버스가 온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사실이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제야 다른 날보다 더 온기 가득한 토요일 아침의 햇살 속에 한가로이 서 있는 내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다림 끝에 고대하던 307번 버스가 도착했다.

매번 타는 버스인데, 오늘은 왠지 더 반가웠다.

두 시간 만에 달려온 남편을 드디어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아, 이 맛이었지...'  


앞으로도 나는 외출을 하면서 버스 시간 어플을 들여다보겠지만, 간혹 어플이 고장 나고 버스 전광판이 먹통이 돼도 괜찮다.


그런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대로 다 사는 맛이 있는 것이니까.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불안 #기다림 #버스정류소 #사는맛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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