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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맛

식혜, 기억의 맛

by 공감수집가

“밥은 먹었니?

"...."

"아차, 내가 아까 물어봤나?”
동안 미모를 자랑하시며 영원히 젊은 엄마일 것 같았던 우리 김여사 님이 요즘 들어 부쩍 깜빡깜빡하신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우리 집 김치를 맛보고 나면 어딜 놀러 갈 때마다 김치 담당은 항상 나였다. 과장 좀 보태서 아내는 나랑 같이 살면 어머님 닭볶음탕을 평생 먹을 수 있겠구나 기대하며 내 프러포즈를 받아줬단다.


그런 엄마의 손맛이 변했다.

솔직히 말할까, 둘러댈까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친구들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지 내내 시무룩하신다.

통화 내내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며 적잖이 핀잔을 받았나 보다.

곧잘 짜증 냈던 나도 할 말은 없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엄마를 모시고 치매 관련 검사를 받았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치매안심센터, 신경과 CT 촬영, 정신건강의학과 상담까지.

결과적으로 아직 문제는 없어 보이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단계라고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퇴직 후 우울증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 가능성을 언급하며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다.

얼마 후 댁에 갔더니 각종 포스트잇에 생활 속 치매 예방 훈련법이 가득 적혀 있었다.

"매일 산책 30분", "오늘 날짜 확인하기", "손자 집 주소 외우기".

영하 8도 날씨에도 가볍게 산책을 하고 오신다니, 그 의지만큼은 젊을 적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식혜.jpg photo by 공감수집가


이번 추석에 식혜를 잔뜩 해서 주셨다.

엄마의 식혜는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대표 음식이자 손맛의 상징이기도 하다.

적당히 달면서도 개운한 그 맛.

지난 구정 식혜는 너무 달고 텁텁했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억지로 마셨다.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에 식혜통을 넣기 전, 뚜껑을 열었다.

은근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첫 모금을 떠서 입에 넣는다. 혀끝에서 천천히 맛을 음미한다.

적당히 달다. 깔끔하다. 밥알이 부드럽게 씹힌다.

"맛있네."

긴장이 풀린다.


자주 해달라고 말씀드려야겠다.

엄마가 기억하는 그 맛을 계속 만드실 수 있도록. 엄마가 당신의 손맛을 잊지 않도록.

아니, 내가 엄마의 그 맛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누굴 위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식혜가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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