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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보다 '안심'

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by 공감수집가

안심

엄마의 실수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최근 들어 아내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건 십여 년 전에도 그러셨고, 은행 업무는 어려워하시긴 해도 아직 큰 실수하신 적은 없잖아."

"그런가. 계좌 이체하고 서류 보내는 일을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신 적은 없는데."

"MRI 검사도 문제없었고, 치매안심센터도 괜찮다니까 좀 더 지켜보자.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한 번에 따고 저렇게 일도 하시는데."

아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어머님이 절대 치매 쪽은 아니라고 생각해."


나보다 더 엄마를 잘 이해하고 공감 능력도 월등한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됐다.

그때는 직장을 옮기고 연고도 없는 신도시로 이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진 때이기도 했다.

'의심'보다 '안심'하고 싶었다.


이사를 가면서 거리가 2배 이상 멀어졌음에도 신혼 때부터 해온 약속을 지켰다.

2주에 한 번 어머니와 시간 보내기.

"이렇게 시댁에 자주 찾아오는 며느리가 어딨냐."

엄마는 늘 좋은 거, 맛있는 거만 사주셨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행복한 시어머니인지 일장연설 하셨다.

여전히 밝고 건강해 보이셨다.


회사에서 받은 전화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근무 시간대에는 전화를 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무슨 일인가 싶어 냉큼 받았다.

"회사니? 전화해도 되는 거야...?"

푹 가라앉은 엄마의 목소리.

"네. 괜찮아요. 조용한 곳으로 나왔어요. 말씀하세요."

".... 내가 고민을 해봤는데, 당분간 너랑 아이만 집에 오면 안 될까?"

"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너한테 말할까 말까 계속 고민했는데. 소영이가 우리 집에 오는 걸 안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럴 리가요. 몇 년을 그렇게 왔다 갔다 해도 못 느꼈는데."

"아냐. 암만 생각해도 우리 집에 오는 걸 싫어하는 거 같아. 그냥 아이랑 너만 보자. 소영이도 쉬라고 하고."

"…."

이상했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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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퇴근길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퇴근 중이구나? 그럼 혼자 있는 거지?"

"네 말씀하세요."

"내가 얘기했나? 실은 소영이가 우리 집에 오는 걸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당분간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분간 안 본다뇨?"

어제도 같은 얘기를 하셨다. 그런데 기억을 못 하신다.

"무슨 일이 있으면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엊그제 전화 내용도 그렇고 답답하네요."

그제야 터져 나오는 엄마의 울먹임.

"얼마 전에 우연히 소영이가 우리 집 앞에서 '아… 올라가기 싫다.' 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 정도면 안 보는 게 낫겠다 싶다."

"네? 어디서요? 언제 그랬는데요?"

"몇 주 전인가 우리 집 왔을 때 아파트 앞에 가게 있잖아. 거기서 계단 올라가는데 그랬다니까."

"뭔가 오해 아니에요?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차가 막혀서 가기 싫다고 했다거나, 잘못 들은 거 아닐까요?"

"아냐. 내가 확실히 들었어."

목소리에 확신이 가득했다.

"내가 있는 걸 알고 깜짝 놀라더라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너희 집에도 자주 오라고 하더니 요새 그런 말도 없고. 내 집에 왔다가도 부랴부랴 올라가려는 게 나랑 있기 싫어하는 거 같아."

"이제 오지 말라고 전해라."

"엄마..."

"나도 맘 불편하고. 그 애도 얼마나 불편하겠니."

엄마가 흐느꼈다.

"난 정말 딸처럼 생각했고, 고부 갈등이란 거 평생 모르고 살 줄 알았는데. 내가 요새 잠이 안 온다."



1년

아내는 엄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십수 년간 같이 지내온 내가 안다. 때로는 나보다 더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배려한다.

엄마도 아내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며느리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 친구분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며칠을 고민했다.

아내에게 말해야 할까, 말지 말아야 할까.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아내 없이 엄마를 만날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잊으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의 마음 상태를 아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엄마가 좋아하는 떡을 준비했다.

"어머니 이거 좋아하시잖아" 하며 장 볼 때마다 챙겼다.

어느 쪽도 혼자 상처받게 둘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어렵게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아내가 황당해했다.

"절대 안 그랬어. 어머니가 왜 그러시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엄마는 그렇게 믿고 계셔..."

"나 정말 그런 적 없어. 날 몰라?"

"알아. 나는 너 믿어. 다만 이런 상태에서 엄마를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 ..."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으로 금이 갔다.

1년을 만나지 않았다.

그 1년 동안 나는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엄마를 만나고 오면 아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별 얘기 없으셔?"

엄마가 물으셨다. "소영이는 별 일 없지?"

그리고 그 1년 동안, 엄마의 대인 관계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끔 엄마의 친구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들 엄마를 걱정하는 하소연이었다.

엄마의 세계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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