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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오해 사이

그렇게 엄마는 고립되어 갔다

by 공감수집가

가족보다 가까웠던 사이

"요즘은 옥이 아주머니 안 보시나 봐요?"

"그러게. 요새 연락을 통 못했네."

옥이 아주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족처럼 지냈던 분이다.

서로의 아이들에게 모유를 나누며 키웠고, 아주머니 첫 손주 돌잔치에 친동생은 안 불러도 엄마는 꼭 오라며 신신 당부했던 막역한 사이다.

직장인이었던 엄마를 대신해 수년간 내 저녁을 챙겨주신 분. 나에게도 반쪽 엄마 같은 존재였다.

밝고 건강했던 아주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셨다. 가까이 살던 엄마는 이전보다 더 자주 통화하고 만나셨다.

5년 전에는 아주머니 남편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다.

엄마는 내가 옆에서 말릴 정도로 지극정성이셨다. 수차례 병문안을 다녀오고, 당신 냉장고보다 아주머니 댁 냉장고를 더 가득 채워놓았다.

한 번 뵐 때마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곧잘 하셨는데 최근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아주머니 남편 분 건강은 어떠시대요?"

"글쎄. 좀 좋아졌으려나."

"이번 김장 절임 배추는 아주머니한테 부탁 안 해요?"

"이번에는 다른 데 맡길까 봐."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불편하기도 하고."


사라진 원목 교자상

꼬치꼬치 캐물어 알게 된 이야기.

엄마가 아끼던 원목 교자상과 대야를 아주머니가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은 집으로 이사 가면서 짐 둘 곳이 없었잖아. 그때 옥이 아줌마가 본인 집 베란다에 둘 테니 나중에 필요할 때 말하라고 했거든."

"그래서요?"

"이제 쓸 일이 생겨서 가져간다고 했지. 근데 베란다에 갔더니 없지 뭐야."

목소리가 높아졌다.

"분명히 여러 상들이 겹쳐져 있었고 안쪽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없잖아. 대야는 아예 가져간 적이 없다고 하고."

꽤 구체적인 설명이었다.

"옥이 아줌마가 전부터 그 상을 탐냈어. 끝내 가져갔네 그래. 그것 때문에 다투고 안 본 지 오래야."


조목조목 따져봤다.

"엄마, 아주머니는 욕심 많은 분이 아니잖아요. 어릴 때부터 봐왔는데."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큰 짐덩이를 본인 집에 선뜻 둔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엄마가 헷갈리신 거 아닐까요?"

"내가 헷갈릴 리가 있나. 분명히 봤어."

"직장인이었던 엄마를 대신해서 수년간 저를 챙겨주신 분이에요. 그냥 드린 셈 치면 안 돼요?"

엄마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그거고, 이번에는 확실히 짚고 넘어갈 거야."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난번엔 또 내가 택시를 타느라고 전화를 못 받았는데 소리를 확 지르는 거야. 왜 내 전화 안 받냐며."

"..."

"내가 무슨 하인이야?! 너 어릴 적에 돌봐준 것 때문에 병원도 같이 다니고 식사도 챙긴 건데. 누굴 하인으로 알아."

더 이상 설명해 봐야 소용없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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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으레 겪는 오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 옥이 아주머니만이 아니었다는 걸.

오래 알고 지낸 분들과 하나둘 연락이 끊기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내 돈을 안 갚았어."

"그 사람이 내 물건을 가져갔어."

"그 사람이 나한테 소리를 질렀어."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됐다.

처음엔 엄마 말이 맞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달랐다.


어머니의 휴대폰을 살펴보다가 우연히 차단된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들어온 친구분의 이름이었다.

'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그렇게나 서로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사인데. 어쩜 이러니...'

문자에서는 한숨과 서운함이 묻어났다.


고립

엄마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점점 더 강해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친구들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아니, 엄마의 기억이 친구들을 지워가고 있다는 걸.


수십 년 지기 친구들이 하나둘 떠났다. 전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약속도 뜸해졌다.

엄마는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이 배신했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나는 그 모든 걸 지켜보며 무력했다.

엄마를 설득할 수도,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저 엄마의 세계가 조금씩 작아지는 걸 바라볼 뿐이었다.


치매는 기억뿐 아니라, 사람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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