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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인권, 그리고 우리가 외면했던 질문

기억은 사라져도, 존엄은 남는다

by 공감수집가

출근길, 김미경 TV 유튜브를 통해 '치매 인권'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치매에 걸린 부모가 자식도 못 알아보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면 정말 살 가치가 없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내가 널 기억해야만 내 인생이 가치 있는 거니?

못하면 내 인생이 가치가 없는 거니?

치매 걸린 상태로 행복하게 살다 가면 안 되는 거니?

뇌 기억 중 일부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살 가치가 없니?"


치매를 앓고 있는 부모들을 대변해 허를 찌르는 그녀의 질문이었다.

자식은 알아보지 못해도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 그만이라는 것. 자식도 어쩌지 못하는, 존엄성 있는 노후를 위한 그들의 권리라는 것.


치매 인권 존엄.png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다는 것


감히 추측하건대, '그렇게 살아서 뭐 하나'라는 마음은 치매 환자들의 인권이 집에서도 시설에서도 병원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나온 안쓰러움일 것이다.

게다가 치매 환자는 치매 하나만 앓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여러 중병이 동반되어 육체적 고통까지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지켜보는 가족도 함께 무너진다. 밤새 배회하는 부모를 지키다 탈진하고,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듣다 인내심이 바닥나고, 폭언 앞에서 눈물을 삼킨다.


치매 진단 이후 더 나빠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 중인 우리 엄마.

집에 가면 곳곳에 치매 관련 지침 사항이 메모지에 적혀 있다.

'손가락 끝을 자극해라. 토마토, 브로콜리 먹기.'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는 거침없는 말도 쓰여 있다.

'제발 좀 정신 차려. 애들한테 짐이 될 거야?'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나 역시 엄마가 언젠가 가족을 못 알아보고 과거 행복했던 기억들도 다 잊는다면 사는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김미경 강사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것과 엄마가 나를 기억하는 것, 그 어느 것도 엄마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못 알아볼 때, 같은 말을 열 번째 반복할 때, 화장실을 못 찾아 헤맬 때도 이 깨달음을 지킬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래도 적어도 방향은 알게 됐다.

내가 엄마를 기억하는 것과 엄마가 나를 기억하는 것, 그 어느 것도 엄마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고, 느끼고, 존재한다. 메모지에 적힌 절박한 글씨들은 엄마가 여전히 자신의 삶을 지키려 애쓰고 있다는 증거다. 그 노력 자체가 존엄하고 가치 있다.


치매 인권이란, 결국 기억을 잃어도 여전히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권리다.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을 살아갈 권리다. 누군가의 엄마나 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히 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권리다.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해도 괜찮다. 짜증 내고 후회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또 무너지고. 그 과정 자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방식일 수도 있다.

엄마의 메모지를 볼 때마다 다짐한다. 언젠가 엄마가 나를 못 알아봐도, 최선을 다해 엄마를 존중하겠다고. 엄마의 세계가 달라져도, 그 세계 안에서 엄마가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겠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기억은 사라져도 존엄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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