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판정을 받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인 엄마.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일까? 이전보다 밝은 모습이 보기 좋다. 초등학생 손자는 할머니 집에서 자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행정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요가 프로그램도 다니면서 안팎으로 건강해 보인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돈 관리다.
엄마는 젊은 시절에도 소득, 지출 관리가 잘 안 되는 편이긴 했다. 50년 가까이 일을 하셨다. 정말 아끼고 아껴서 생활했다. 그럼에도 모아둔 돈이 없다. 어째서일까?
몇 년 전부터 입출금, 계좌 이체에서 실수가 반복된면서 내게 돈 관리를 넘기셨다.
한 사람 분의 돈 관리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번거로운 일이다.
각종 연금, 고정 지출비, 공과금 등을 관리하다 보면 공동인증서 등록과 갱신을 거쳐야만 한다. 문제는 공동인증서가 1년마다 만료된다는 것이다. 만료되면 엄마 휴대폰으로 인증번호를 받아야 하는데, 엄마는 가족 외에는 대부분의 문자 메시지를 습관처럼 차단한다.
"엄마, 인증번호 왔어요?" "뭐? 아무것도 안 왔는데." "차단 목록 확인해 보세요." "차단 목록이 뭐야?"
결국 내가 직접 가서 차단을 풀고, 인증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등록해야 한다. 이 과정을 은행마다 반복해야 한다.
보이스피싱이 성행하면서 은행마다 보안성을 높이기 위해 인증 절차가 하나둘 더해졌다. 간단한 이체 하나에도 본인 확인, OTP 인증, 추가 비밀번호까지. 엄마를 위한 보안이 오히려 엄마의 금융 생활을 막는다.
자동이체도 골칫거리다. 엄마는 은행 서너 곳에 계좌를 갖고 있고, 각각 다른 항목들이 자동이체로 연결되어 있었다. 통신비는 A은행, 보험료는 B은행, 공과금은 C은행. 어느 날 통장 잔액이 부족해 자동이체가 실패하면, 그때부터 연체료가 붙기 시작한다.
결국 내가 각 은행 앱에 접속해서 자동이체 계좌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했다. 엄마 휴대폰으로 인증번호를 받고, 본인 확인을 하고, 계좌를 연결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하루 종일 걸렸다.
잃어버린 줄 알고 재발급한 체크카드, 지역 화폐 카드만 8장이다. 찾았다 싶으면 또 없어진다. 카드를 정지시키고 재발급받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겨우 정리를 끝내고 최근부터 한 장의 체크카드만 쓰기로 합의했다. 손자가 놀러 오면 맛난 것을 사줘야 하니 넉넉하게 돈을 넣어두곤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잔액이 부족했다.
조회해 보니 현금을 자주 인출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30만 원을 인출하고 5분 뒤에 40만 원을 인출했다. 혹시나 싶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인출한 현금은 잘 갖고 계시죠?"
"현금? 응 그래, 잘 갖고 있지."
"네, 목돈을 찾으셨던데 잘 챙겨 두세요."
"응, 그럼. 나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출처가 궁금했지만 엄마 돈인데 너무 과하게 개입하고 싶진 않았다.
며칠 뒤 체크카드 잔고가 모자라니 돈을 보내달라는 엄마.
"엄마. 그때 현금 많이 찾으셨던데 그걸 쓰시면 어때요?"
"현금? 내가 화장품이 다 떨어졌어. 화장품을 사는데 3만 원으로 어떻게 사니?"
"아니, 얼마 전에 70만 원을 찾으셨던데 3만 원이라뇨? 설마 다 쓰셨어요?"
"70? 내가 그렇게 큰돈을 어디에 써. 지금 현금은 얼마 없는데?"
"아니, 분명 돈을 찾으셨다니까요? 기록에 남아 있는데."
"네가 목돈 갖고 있는 거 불안해했잖아. 남는 돈 입금해 놓으라고 해서 다시 넣어 놨는데. 내가 70만 원이나 쓸 일이 뭐가 있어."
"아 다시 넣어두신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나중에 확인해 보니 입금된 돈은 없었다.
엄마는 임기응변이 뛰어나다. 가끔은 너무 구체적이고 그럴듯해서 절로 납득이 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달간 출금한 돈을 계산해 보면 꽤 큰돈이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길이 없다. 물어보면 늘 나오는 엄마의 대답.
"내가 돈 쓸 일이 뭐 있어. 손자 오면 밥이나 간식이나 먹는 거지."
"그럼 대체 그 큰돈은 어디에 쓰신 거예요?"
"무슨 돈? 아, 그거 나중에 손자 대학 등록금으로 줄라고 적금 들었는데?"
적금은 없다.
어제 근무 시간에 엄마로부터 급하게 전화가 왔다. 체크카드가 안 된다는 엄마의 말.
확인해 보니 또 30만 원을 출금했다.
"엄마. 오전에 30만 원이나 찾으셨네요? 그래서 잔액이 없잖아요. 그 돈은 잘 갖고 있는 거죠?"
"아 그랬구나. 그래 여기 있네. 일단 이걸로 사용할게."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온다.
"내가 너한테 현금 맡겼지? 그거 다시 보내주렴."
"네? 무슨 돈이요?"
"내가 너한테 맡겨둔 돈 있잖아."
"엄마, 저한테 돈 맡긴 적 없어요. 저랑 만나지도 않았잖아요. 현금이 없어요? 집에 잘 찾아보세요."
10분 뒤 다시 전화했지만 집 안 어디에도 돈은 없단다.
"분명히 집에 있을 거예요. 잘 찾아보세요."
몇 분 뒤 온 문자.
'다 뒤져봤는데 없어. 내가 왜 이런다니. 정말 살기 싫다.'
다음 날 온 식구가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30만 원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 어디 쓰신 거 아니에요?"
"내가 돈을 쓸 데가 어딨 어."
"누구 만난 적도 없고요?"
"내가 누굴 만나."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맨날 돈 쓸 데가 없다면서 툭하면 30, 40씩 돈 찾고. 대체 어디에 쓰는 건데요?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에요? 그래서 현금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한 거 기억 안 나요? 소득이라곤 연금밖에 없는 분이. 만 원 한 장도 손에 꼭 쥐고 살아야 할 판에. 몇십이 애들 장난이에요?!!"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더 퍼부었다.
"몇 달 전에는 친구랑 돈 문제로 합의금 날리고. 대체 명확한 게 없어. 다른 건 내가 다 커버해도. 돈 문제는 정신 바짝 차리기로 했잖아요. 앞뒤 내용도 모르는 돈을 얼마나 쏟아부어야 정신 차릴 건데요? 무슨 놈의 돈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툭하면 없다, 어떡한다니. 집에 무슨 블랙홀이 있어요? 차라리 저한테 전화를 하지 마세요. 제 속이라도 편하게. 알고 나면 화가 치밀어 올라서 잠도 안 와요. 손자 대학 등록금? 이런 마당에 무슨 돈을 모아요? 연금 관리도 못하면서"
고개를 푹 숙인 엄마. 아내와 아이 모두 내 눈치만 본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최근에 들은 사연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 보이스피싱을 당해 몇 날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못 주무시는 모습을 본 어떤 아들.
대출을 받아서 어머니께 전했단다.
"엄마, 경찰서에서 돈을 찾았대요. 이제 해결됐으니 맘 편히 지내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라진 30만 원 앞에서 화를 쏟아부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존엄은 남는다'라고 쓴 사람이 나였던가. 막상 현실 앞에서 나는 그 깨달음을 지키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켰다. 엄마가 보낸 마지막 문자가 화면에 떠올랐다.
'다 뒤져봤는데 없어. 내가 왜 이런다니. 정말 살기 싫다.'
돈이 어디 갔는지 모르는 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자식에게 화를 듣는 것, 모두 엄마한테도 고통이다.
다음 날 아침, 자동 충전 기능이 있는 카드를 신청했다. 매일 일정 금액만 충전되고, 지출 내역이 실시간으로 알림으로 온다. 적어도 한 번에 큰 돈이 사라지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문자를 보냈다.
'엄마, 어제는 제가 너무 화를 냈어요.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요. 이제 새 카드 만들었으니까 이걸로 적응해 봐요.
읽음 표시가 떴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괜찮다.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려 애쓰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