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동안,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가끔 아프다.
25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고
엄마를 다시 만났지만, 난 여전히 엄마가 보고 싶다.
난 여전히 엄마가 그립다.
지금의 다시 만난 엄마도 좋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엄마가 보고 싶다.
버스 안에서 창밖에 보이는 간판 글자들을 읽으면
우리 훈이 잘한다면서 좋아해 주던
바로 그 엄마가 그립다.
오늘 아침에는 거울을 보다가 아버지의 눈빛을 발견했다.
내가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그 눈빛이 내 안에도 있었다. 몸서리가 쳤다.
가장 증오하고 싫어했던 얼굴이 내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전이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저주받는 것 같다.
이런 날들이 있다.
치유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픈 날들.
극복했다고 믿었는데 다시 무너지는 날들.
당신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 어빈 얄롬(Irvin Yalom)은
"치유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과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치유'를 잘못 이해했다.
치유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라고, 과거가 완전히 지워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즈(Steven Hayes)는 '수용과 전념 치료(ACT)'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고통을 피하려고 발버둥 칠 때 오히려 더 큰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불편한 감정이나 기억이 떠올라도 그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여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렇다. 우리는 상처와 함께 유연하게 살아가면 된다.
상처를 없애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도 아픈 날이 있어도 괜찮다.
가끔 과거에 발목 잡혀도 괜찮다.
때로는 눈물이 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아픔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울어도 다시 웃는 것이다.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을 나선형으로 설명했다.
직선이 아니라 나선형.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지만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우리의 치유도 그렇다.
같은 아픔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높이에서 그것을 바라본다.
매번 조금씩 더 지혜롭게 대처한다.
당신이 내 글들을 읽으며 위로받았다면 기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아도 당신은 충분히 가치 있다.
여전히 상처가 있어도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아직도 아픈 날이 있어도 당신의 삶은 의미 있다.
나는 오늘도 스시를 만든다.
손님 중에는 지친 얼굴의 이민자가 있고, 외로운 눈빛의 유학생이 있다.
나는 그들의 상처를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안다.
그들도 나처럼 아직도 아픈 날들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 정성스럽게 만든다.
이 작은 위로가 그들의 하루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기를 바라며.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상처받을 수 있음(vulnerability)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라고 했다.
우리가 상처받을 수 있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연민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상처받을 수 있음이 우리를 연결한다.
완벽한 사람들끼리는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괜찮다. 아직도 아파도 괜찮다.
그것이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그것이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이니까.
우리는 모두 '아직도 아픈 날들'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될 수 있다.
당신의 상처가 언젠가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를.
당신의 눈물이 언젠가는 누군가의 희망이 되기를.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치유되기를.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