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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우리는 왜 워홀을 가는가

나가지 못해 환장한 사람들

어학연수와 워킹 홀리데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청춘들에겐 로망처럼 들리는 두 가지다. 하나 나는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는지 그 로망을 이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치부했더랬다. 대학교 2,3학년쯤엔 휴학을 해서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남들의 소망에, 아니, 여행을 가면 여행을 갈 것이지 뭐하러 해외까지 나가서 공부하고 일하냐는 나의 물음은 어쩌면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회 없이 즐기고 부모님의 바람에 맞춰 고시공부를 시작하려 했던 원대한 계획. 조급함이란 어찌나 여유를 좀먹는 괴물인지 디즈니랜드 열차에 앉은 오후 여섯 시에서조차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더라. 돌아다니며 본 건 많고, 부모님의 기대에 대한 치기 어린 반항심에 쓴 돈은 아깝고. 명확한 동기 없는 공부로 아슬아슬한 불합격만 두 번 받았을 때, 전환점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집중적인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상하게 자리에 앉아 몰입하려는 찰나, 흑역사가 떠오르는 것을. 사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뇌가 자극을 받으면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도 영향을 받는다. 즉 어지간히 즐거울 일 없는 수험생들의 입장에선 가뜩이나 남들 놀 때-그러나 남들도 놀고 있진 않다. 슬프게도 그렇게 보이는 것뿐-공부하려니 우울한데 뇌까지 안 도와주는 셈. 어쨌거나 그 덕분에 책상에 앉아 지식 탐구가 아닌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며 부끄러움 속에서 허우적댔다. 흔히들 고시 기간이 길면 소위 '고시오 패스'로 진화한다 하지만 딱히 긴 연차를 채운 것도 아닌지 경쟁심보단 광범위한 연민이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성찰을 거듭하며 그간 당연스레 느꼈던 풍족함, 부족한 사회생활, 알고도 빠르게 지나쳤던 나의 부조리, 세상을 모르는 책상물림 등 단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자발적으로 동기가 생길 때까지 쳐다보지도 않겠다며 공부를 손에서 놓은 후, 다른 길로 진입한 남들의 속도를 따라가려 해 봐도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눈에 첫 숟갈이 배부르지 않은 건 당연지사. 돌이켜 보면 남들이 이삼 년 걸릴 일을 반년 안에 따라가려 온갖 우물을 파댔으니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쯤 되니 반년의 어학연수, 일 년의 워홀은 더 이상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타인이 된 자유로움

내 첫 자유여행은 남들 다 가본 오사카였다. 일본여행의 본격적인 유행에 앞서 유행의 전조쯤을 보였던 2015년, 수능을 마치고 자유라는 딱지 붙인 여행사 상품으로 언니와 떠났다. 부푼 기대를 품에 안고 간 곳엔 막상 한국인만 가득했다. 에비스 다리도 한국인, 라멘집도 한국인, 하다못해 온천도 한국인인 곳에서 유난히 평온한 표정의 언니에게 좋냐고 물으니 하던 말,


"표지판도 일본어고 어쨌거나 외국이잖아. 한국에서 벗어난 거 같아서 좋아."


아, 오랜 수능 준비에 시달렸던 우리 언니. 흔히들 여행의 이유로 자아 찾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다. 밖에 나오면 오랫동안 무미건조했던 가슴이 설레고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에 벅차올라 행동에 걸어놨던 제약이 훌쩍 낮아지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모르던 사람, 앞으로도 모를 사람들 사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으로서의 자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남으로써의 자유. 열 개국이 넘는 나라를 발만 걸치듯이 단기여행으로 다녀오다 어느새 공항에서부터 싫증을 느끼던 내가 워홀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단지 이방인이 될 수 있는 자유.


그래서 대체 왜 가는 건데?

막상 결정하고 보니 주변에 워홀을 간 또래가 없었다. 교사, 로스쿨, 고시와 공무원, 취업준비로 바쁜 친구들. 여유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각자의 인생을 준비하는 그 안에서 다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저 길이 맞는 거 아닐까, 어렸을 적 혼자 기대했던 것처럼 무언가 특별한 어른이 된다는 건 하늘에서 비대신 사탕이 내리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아닐까.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도피한다는 자책도 강하게 들었다. 에스컬레이터 같은 인생을 차곡차곡 밟아오던 자식이 몇 년 간 좀 힘들었다고 해외로 훌쩍 떠버리는 일은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보다 더할 터였다. 친척 어르신까지 타이른 지 오 개월 후, 나는 인천공항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장기 비자 지원과 문화가 매력적인 영국, 가깝고 역시 문화가 매력적인 일본과 대만, 금전 면에서 이득이 있는 호주... 이미 유행 지난 캐나다에 몸을 싣는 내 워홀의 표면적 이유는 당분간 쉬워졌다는 영주권 도전과 영어, 근본적 이유는 맘껏 글을 쓰겠다는 포부. 지금도 그렇게까지 세상 물정 모르는 결정을 내린 게 신기해 자주 듣는 친구의 농담처럼 내 머리에 어마어마한 꽃밭이 있는가 싶지만, 스물네 시간 넘게 마스크를 끼고 땀을 흘리며 내가 한 생각은 어차피 필 거면 크고 예쁜 꽃이 잔뜩 만개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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