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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내 집 밖에 갇힌 사연

상상보다 현실이 무서운 법

그럴 때 있지 않나. 상상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되는. 입주 첫 주, 뻑뻑한 열쇠로 버벅거릴 때 영영 문을 못 열게 되면 어떡하냐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자주 했다. 입주 세 주차, 힘을 줘서 쑤셔 넣으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입주 팔주 차, 살다 보면 교훈도 당신을 배신하는 법이다.


크루즈 때문에 나는 퇴근이 늦은 대신 출근도 늦어 아침에 모든 집안일을 끝내는 편이다. 세탁기가 일 층에 있기에 4-5일 치를 한 번에 돌리곤 하는데, 그날따라 미적거리다 겨우겨우 잠옷용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로 열쇠만 들고 나섰다. 두 개의 루니(1달러 동전)를 넣고 돌아와 영어공부를 하는 동시에 냉동고기 해동 및 밥 안치기를 하고 정확히 삼십오 분 후, 여전한 차림새로 나선 나는 축축한 빨래 더미를 들고 열쇠를 꽃았다. 아.


이해하면 무서운 사진


정~말 무서웠다. 덜컹덜컹 듣기 싫은 소리가 민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포기할 수 없는 헛수고가 계속되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잠옷 차림에 무릎까지 오는 크기의 빨래 더미는 이동반경을 좁힐 뿐, 심지어 휴대폰조차 없었다. 일인가구에게 자고로 스마트폰이란 신변보호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결국 앞집 문을 두드린다.


조마조마한 내게 나온 사람은 흡사 모델 같았다. 유럽 출신으로 보이는 흑발의 그녀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아파트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건물은 부동산 회사 소유라 정해진 집주인이 없다고. 그러나 실패한 두 번의 전화. 아마 그녀도 포기하고 싶었을 거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 분 가량 침묵에 빠져들었다. 심각한 미안함과 동시에 나 좀 살려달란 구질구질함이 교차하던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나에게 바꿔주는 그녀. 으, 다시 찾아온 실전 영어 통화다.


"안녕, 무슨 일이야?"

"열쇠가 안 빠져!"

"오 이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는데, " (극렬한 배신감)


"하지만 locksmith를 불러줄 순 있어" (안도)


그렇다, 열쇠업자, 영어로는 locksmith. 학교에서 배울 법한 단어도 아니고, 인터넷 검색에도 바로 등장하는 단어는 아니건만 <먼 나라 이웃나라-독일 편>에서 본 '슈미트, 영어로 smith인 이름은 대장장이에서 유래한다'는 토막상식이 곧바로 생각났다. 이래서 상식, 상식하나 싶던 순간. 얼마나 기다릴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알겠다고 답한 나를 본 그녀는 나만 괜찮다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호의를 보였다. 잠옷 차림에 민폐를 끼칠 순 없어 거절한 나, 후회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실로 끔찍한 기다림

한국 같은 속도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열쇠업자를 한 시간 이상 기다린 이 때는 순식간에 늙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시계도 없는 상황. 차라리 전화라도 다시 빌릴까 앞집 문을 소심하게 두드린 찰나, 문 너머로 벨소리가 울렸다.


"잘됐네, 열쇠업자가 곧 온대! 로비에 있다가 정문을 열어주라고 하네."


나는 세탁물도 잊고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 와중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복도를 들락거리는 청소업자와 배달부 청년 두 명이 왔다 갔다 하느라 문을 열어 둔 탓에 폭풍을 온몸으로 맞았다.


천신만고의 기다림 끝에 도착한 그는 오 분 만에 문을 땄다. 이윽고 열쇠를 빼내야 하는 상황, 가는 날에 아주 오일장이라도 열린 건지 출근하셨던 룸메이트들이 돌아와 버렸다. 사장님께 전화를 드리느라 흥분한 나의 목소리에 더해 아직도 불이 켜진 밥솥과 녹아내려 파리가 꼬이는 고기, 아침 설거지가 쌓인 싱크대와 문을 열어놓고 빨래를 정리하는 내 모습을 보았을 그분들의 심정이란...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마주한 동거인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열쇠업자는 아주 작고 동그란 철판을 하나 보여줬다. 그래, 이 녀석이 주범이었단 말이지.


아주 즐거운 우연 이야기

가장 어리지만 가장 의젓한 J. 늦게 출근한 내가 지각한 이유를 들려주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알고 보니 그녀도 전날 집 문이 잠겼다고. 현관 안에 또 문이 있어 집주인이 복도에서 갇히지 말라며 입주 전부터 신신당부를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밤 아홉 시, 안쪽문이 잠겨 복도에 갇힌 J는 방도가 없다는 집주인과 빅토리아답게 여섯 시 이후 전부 문을 닫은 열쇠업체, 하필이면 밴쿠버로 돌아간 룸메이트에게까지 연락을 돌린 끝에 창문을 따고 들어갔다고 한다. "말하자면 내 집에 침입한 거지." 아아, J양의 집은 아직도 창문이 하나 없다고 전해진다.


실수담으로 신나게 떠들던 우리에게 새옹지마의 축복이 내리기라도 했을까. 정오 로비에서 악몽을 선사해 준 폭풍 덕에 가게 문을 일찍 닫을 수 있었다. 시급까지 정상근무로 참작되었고 말이다. 지금조차 어떻게 혼자서 큰 스트레스 없이 버텼을까 싶은 추억. 정말로 모든 일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란 법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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