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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반경 1km 한 치 앞도 알 수 없음

911과의 사투

하필 자정에 떠나는 크루즈 덕분에 근방에선 유일하게 10시 넘어 닫는 우리 가게. 오후 6시면 상권이 전부 멈추는 빅토리아의 특성 때문인지 밤만 되면 편의점과 안내소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5월 밤, 밖에서 들어온 싱글벙글한 표정의 손님.

밖에 사람이 쓰러졌어요! 911 좀 불러주세요!


동시에 멈춘 J와 나. 프리토킹이 가능해도 전자음 섞인 소리는 자주 혼동하는 탓에 전화할 때 유달리 긴장하는 난 한 발 물러섰다. 나선다면 또 하나의 도전이겠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 그럴 순 없어서. 


"나, 나 못해! 네가 좀 해줘!"


그리고 이 말은 내 입이 아니라 J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언제나 침착했던 그녀였지만 막상 급박해지니 내가 외국인이란 사실까지 까먹었나 보다. 평소에 너무 현란한 농담을 선보여서일까. 어쨌거나 내가 만류한 탓에 결국 수화기를 든 그녀는 잠깐의 대화 후 이쪽에 전화를 넘기고 나가버렸다. 게다가 내 앞으로 무수히 늘어선 손님들의 줄. 특히 한창 계산 중이었던, 이미 카드까지 꼽아버린 손님의 벙찐 얼굴이 떠오른다. 막상 수화기를 드니 건너편에서 묻는 목소리.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안전요원이 그새 교체되었던 걸까, 그 질문의 의도는 사고 경위를 다시 설명하라는 뜻이었지만 나는 J가 내게 전화를 넘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 의미로 받아들여 버렸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No, Nothing happened.)

   

맥락이란 중요하다. 꼬이기 시작하면 골치 아픈 상황을 연출하니까. 내 대답에 장난전화로 착각해 단단히 화가 난 그, 설교를 시작한다.


“이 보세요, 마담. 아시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응급상황에 대기하며 이는-”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 말은 방금 전화하던 여자가 상황을 지켜보러 나갔다는 뜻이었어요. 밖에 여전히 다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자 여기서 상식 하나. 당황하면 말이 잘 안 나온다. 발전형, 진짜 급하게 당황하면 무슨 모국어처럼 말이 나온다. 이러니 안전요원도 내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몰랐나 보다. 그는 급기야 전화 녹음 등 여러 가지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방금 전 온 힘을 준 나는 체력 방진, 게다가 가게의 수화기 구조가 복잡한 탓에 침묵을 유지했다. 상대도 나도 답답한 찰나, 드디어 돌아온 J. 이렇게 반가울 수가.


워낙 좋은 위치 덕분에 질리도록 보는 매일 밤 풍경이지만 이날만큼은 이 입지가 야속했다


때맞춘 J의 등장으로 원위치에 돌아와 가게 구석까지 늘어진 손님 줄을 처리하는데, 아까 그 스마일 걸이 와서 말한다.


"저기, 누가 스노우볼을 부서뜨렸어요."


낡고 지친 얼굴에 참담함까지 더해진 우리들. 불쌍한 J가 빗자루와 청소기를 들고 이미 얼룩진 나무 바닥을 쓸어내는 동안 E가 갑자기 내게 와 그랬다.


"이 사람 내 친군데 화장실 문 열쇠 좀 줘."


처음엔 두 귀를 의심했다.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냐는 심정이었는데 눈앞에 들어온 그 친구란 사람의 손이 빨갛게 얼룩져 있었다. 당황한 내가 구급 팩을 꺼내자 그녀가 웃으면서 그런다. 피가 아니고 빨간 펜이 샜다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기겁했을까.


놀랍게도 911사건은 우리가 퇴근할 때까지도 끝나지 못했다. 조금 전 시끄럽게 등장한 앰뷸런스가 마감 시간에도 나타난 걸 보아하니 우리 가게뿐만 아니라 현장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도 911을 불러서 혼선이 생겼던 것 같다. 게다가 남의 속사정은 기막히게 아는 E가 얻어들은 내용에 따르면 불쌍한 그 사람은 예비신랑으로,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도 제발 약혼녀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며 간청했다고. 그녀 왈, "아무래도 자기가 술 취해 쓰러졌으니까." 이럴 때만 핵심을 찌르지.


어쨌거나 우리의 귀갓길은 흥분이 가라앉지 못한 탓에 꽤 소란스러웠다. 중요 화제는 다친 사람에 관한 걱정과 J도 그렇게 당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삼스러움. 실제로도 그녀가 911 전화를 꺼렸을 땐 조금 놀랐다. 친절하기로 소문난 캐나다인들도 신고전화가 부담스러운 게 새삼 신기해서. J의 변명으로는 다친 사람의 신상을 묻는다는데, 하기사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혈액형이나 주소, 지인 여부, 사건 발생 위치 등 난처한 내용을 질문하면 모국어여도 내게 떠넘기고 싶은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심지어는 구급차 비용 때문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도와주다 화를 입을까 봐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으니 여기라고 다를까.

하지만 이들이 끝내 도움을 거절하는 모습은 잘 보지 못한 것 같다. 이방인인 나를 도와준 사람들, 무서워하면서도 결국 수화기를 든 J, 혼선 끝에 몰려온 두 대의 구급차를 보면 그렇게 느낀다. 해를 입을 수 있으니 도와주지 말자는 분위기가 아직은 팽배하지 않아 다행이다. 빅토리아가 캐나다 내에서 가장 여유롭고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라는데, 앞으로도 따뜻한 도시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한낮의 총격

타국,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곳에 홀로 사는 나는 만날 사람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룸메이트, 부모님을 통한 지인, 그리고 직장동료. 심지어는 일이 몸에 밴 요즈음 마약에 절은 고객이나 척 봐도 이상한 사람이 가게에 오지 않는 이상 일상의 자극이 0에 수렴하는 중이다. 때문에 주말에 쉬고 온 동료를 만나면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쉬는 날에 뭐 했어?


인생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사찰음식 같은 일상만 보내는 J에게도 습관처럼 같은 질문을 하는데, 그날따라 그녀가 미동 한 번 없이 아주 색다른 대답을 건넨다. 나는 무슨 저녁 메뉴 읊는 줄 알았다.


아, 근처에 강도 사건이 일어나서 경찰이 하루 종일 집 밖으로 못 나가게 했어.



담담한 표정과 분위기에 농담 삼아 여기서도 범죄가 일어나냐며 넘긴 나는 저녁 타임으로 들어온 E가 그 얘기를 꺼내서 조금 놀랐다. 은행 강도 날 그 근처에서 드라이브 중이었다며 걱정하는 E의 말에 어째 나만 몰랐나 싶은데 직후 A의 전화가 울린다. 가게는 어떤지, 나는 괜찮은지, J좀 바꿔줄 수 있는지... 그렇게 통화를 시작한 그녀는 이내 웃었다. "아, 은행사건이요."


뭐, J야 집 근처니까 그렇고 나는 왜 다들 괜찮냐고 묻나 싶었는데 그 주말에 지인을 만나자마자 또 똑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그제야 보인 근처의 바리케이드. 그렇다, J는 우리 집 근처에 산다. 바꿔 말하면, 그 은행은 내가 아시안 식품점들을 가는 길목에 위치한 BMO였던 것이다. 불과 일주 전에 그곳에서 세탁기에 쓸 동전을 바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고의 흔적은 어디로 갔는지 평화만 남은 BMO


J의 묘사와 지인의 설명을 합치면 전말은 이렇다. 보통의 강도는 총을 휘두르며 협박하기 때문에 매뉴얼 따라 백 달러 몇 다발 안에 위치추적기를 넣어 주면 된단다. 그런데 이번엔 무장강도들이 밴을 타고 들어와 현장 도착 경찰 6명 중 3명이 부상, 강도 두 명은 사살됐다고. 심지어 밴에서 폭탄이 발견된 데다가 범죄 무기와 강도 명수도 제대로 파악이 안 돼 3인조라 오판한 나머지 이틀 내내 근방 주민들을 격리시켰다고 한다. 추후에 드러난 사실은 이들이 밴쿠버 갱단 소속이었고, 2인조였다는 것.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오판을 내린 경찰에 대한 반발부터 들었다. 반면 J는 격리에 덤덤한 표정이었고, 사람들은 경찰들의 용감함을 칭찬했다. 자국이 총기 합법국인 데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조차 많고 워낙 평화로운 나머지 한 주 내내 대대적으로 사건을 보도한 이곳. 문득 처음 온 달 읽었던 얇디얇은 빅토리아 역사책이 떠올랐다. 그 책엔 1896년 초과정원 승차와 부실관리로 노후된 다리가 붕괴해 55명의 사람이 죽은 트램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추후 읽은 다른 역사책에서도 동일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전쟁과 기근을 배운 사람으로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여기서는 이번 일도 연사의 현장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주변 사람들 입에 같은 화제가 오르내리는 와중에도 무섭다기보단 예측 밖 사고에 당황스럽고 얼떨떨한 거리감이 지속되던 이유는 왜일까. 아무래도 매일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뉴스 헤드라인을 보며 살다가 여기 온 뒤로 잊고 지낸 탓일까. 언제까지고 연결될 것 같았던 사회와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나니 부러움도 들었다. 금방 잊힐 사건이 오래도록 회자될 정도인 이곳의 평화로움에. 


덧,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이해가지 않는 일이 존재하는 법. 지인과 한가롭게 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오후, 차를 얻어 타고 놀러 간 해변에서 좌석에 가방을 두고 나오자 지인이 하는 말. "차에 짐 두고 가지 마세요! 유리창 깨고 훔쳐가요." 아아, 이게 바로 평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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