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를 먼저 말해야겠다. 첫 번째, 우리 가게는 신의 직장까진 아니더라도 영웅급 직장은 된다. 돈이나 복지 면에선 영세사업장에 불과하지만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끝장나게 괜찮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념품 가게로 오는 손님이 진상이어 봤자 얼마나 심하겠는가.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다는 게 노동강도의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여기 와서 느끼는 매일매일이다.
다른 하나, 내 예민함과 소심함은 딱 일반인 수준이다. 타인의 눈엔 별 것 아닌 일도 내겐 크게 다가올 수 있고, 오히려 남들에게 큰일이 내겐 사소할 수 있으니 내가 느끼고 사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 푸념 듣듯이 받아들였으면 한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방어막을 치냐 묻는다면 지금부터 사람을 한없이 좀스럽게 만드는 microaggression(미세한 차별)에 대해 낱낱이 고할 예정이기 때문.
왜 제 쪽으론 오지 않는 건가요
ㄱ자 형으로 구부러진 우리 계산대엔 보통 두 명이 들어가 있곤 한다. 그러면 캐셔 담당이 아닌 사람은 종종 손님과 수다를 떠는데, 스몰 토킹이 자연스러운 친구들이 그 역할을 자주 맡는다. 이내 대화가 끝나고 물건을 건네는 손님들. 나 말고 떠들던 사람 쪽으로!
하기사 대화하던 직원에게 주는 건 그렇다 쳐도 들어오자마자 계산대 앞의 내가 아닌 다른 직원에게 물건을 건네는 경우가 왕왕 있다. 동양인 여성인 데다가 동안이라 그런 걸까. 우리 계산대가 낡았긴 해도 계산대처럼 보일 텐데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주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당황하거나 싸하게 구는 손님들도 있어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덤. 특히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한숨은 곤욕이다.
시혜적이고 시혜적인
A를 만난 첫날, 친해지고 싶었던 그가 이렇게 물었다.
"너도 기생충 봤니? 정말 대단한 영화야! 거기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며?"
아마 빈부격차라고 했다면 사회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poverty라니, 한국과 캐나다의 GDP는 별반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조금 꽁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이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게 된다.
어느 날 창고에서 일하던 나와 사장님, 갑작스레 아프리카에 있을 적 이야기를 하신다.
"거기 사람들은 학교에 가기도 힘들어. 나는 우리 아이들의 유모와 친했지. 지금도 매년마다 200달러씩 그녀에게 보내고 있어. 우리한테는 별 것 아니지만, 그들에겐 정말 도움이 돼."
그리고 나는, '이걸' '갑자기' '나한테' '왜'가 되어 원하시는 만큼의 반응을 못 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이 분과 사적인 이야기부터 세계 정치 이야기까지 나누는 사이인 데다가 가정사까지 터놓고 대화하는 사이지만 그때는 조금 찝찝했던 나머지 대화 주제를 계속 바꾸다 한국이 캐나다와 얼마나 비슷한 수준으로 잘 사는지까지 얘기해 버렸다. 나 원 참.
물론 속으로는 알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보단 베푸는 이들의 삶이 더 훌륭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걸. 그런데 내 안에 곡해에 능한 인종차별주의자가 있나 본지 고깝게 받아들여버리는 게 문제. 성서 모임에 갔을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베푼 선행-대부분은 아시안, 이슬람 유학생들을 성서모임에 초대한 것이었다-으로 열변을 토하던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럼에도 북미에 팽배한 기독교적 이타주의가 얼마나 사회를 개선하는 원동력인지 알기에 이제는 이성과 감정을 분리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게다가 기생충, 오징어 게임은 워낙 유명하니 그저 한국의 좋은 점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많이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보스 이즈 왓칭유
하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이야기. 그때는 내가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을 매도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펜을 들었던 사건. 새 우산이 도착한 날, 창고에서 가격표를 붙이다 똑같은 옛날 제품이 3달러 싼 것을 발견했다. 무엇을 묻고 무엇을 내 힘으로 해야 하는지 분간이 안 됐던, 이 개월을 겨우 넘은 나는 조용히 가격 갈이를 했고 사장님은 옆 창고에서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오셨다.
이게 무슨 소리야! 왜 가격을 바꾸고 있어?!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떨떠름하게 나가신 사장님. 칭찬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아직 신뢰를 얻지 못했나 당황한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음 날까지도 서먹하게 느껴졌던 내 기분이 지금은 신기루 같다. 어쨌거나 그날 밤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 친절하고 더 웃어야 한다고. 본인의 에너지를 소모해서 참자는 의미가 아니라 얼굴에 철판을 깔자는 의미로 말이다.
놀랍게도 이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은 후회가 든다. 당시에는 원망도 있었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란 말이 있는 것처럼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게 현재의 감상이다. 반년을 채워보니 가격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먼저 상사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라는 확신을 얻어서일까. 아직 일을 배워가는 초심자였던 나와 어떤 연고나 추천 없이 외국인을 고용하신 사장님의 조합이었기에 벌어질만한 상황이었고, 그래도 이건 잘했다는 점이 있다면 사사로운 감정을 다음날까지 연연하지 않은 것일 테다.
아마 내가 원하는 건
이제는 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한 관광객들이 점원 한 명 배려하기란 쉽지 않은 데다가 캐나다에선 인종보단 언어 실력이 차별의 지표가 되는 일이 흔하다는 걸. 따지고 보면 유명한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이 많다. 선행은 당연히 남들의 격려가 필요하며 업주 입장에선 외국인 사원의 행동 하나하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너 북한에서 왔니?"보다 이런 상황이 더 힘들었을까. 가장 친한 E가 가끔 '너희 나라에도 방송사가 있다면~' 등 악의 없이 말할 때에도 이런 발언에는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원하는 게 동등한 관계여서일 것이다. 이곳의 유능한 현지인 사원만큼의 대우 말이다. 그러니 특정 영역에서만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특히나 내가 너무 좋아하는 동료들이 매일 힘이 되어 주고, 사장님의 배려가 빛을 발하는 곳에서 굳이 다른 사람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그러니 피드백이나 도움을 오히려 기피하게 되어 버린다. 정말로 "No, It's Okay."가 입에 붙어 버려서 가끔은 내 발에 내가 넘어지는 격이기도 하다만. 그래도 이 기회로 다른 사람을, 그리고 나를 이해했으니 앞으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발전하다 보면 융통성 있게 맞받아치거나 혹은 작은 일로 사사건건 나를 재단하지 않는 힘이 길러지겠지. 일단을 신뢰를 쌓는 게 먼저다. 그게 내가 배우고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