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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어른 한 명을 키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장님 주급이 안 들어왔는데요

평화로운 7월의 어느 금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식료품을 사러 나가는데 계좌엔 한 푼도 없었다. 혹시나 A가 다른 계좌로 잘못 보냈을까 E에게 확인차 문자를 보내니 답장이 왔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일주일치 장을 보러 나왔다고 하자 순순히 사장님께 물어봐 주겠다는 그녀. 그 사이 마트 앞까지 걸어갔는데 웬 안내문이 있었다.


"전국적인 통신장애로(Due to national outtage) Debit(체크카드)이 아닌 신용카드와 현금만 받습니다."


아하, 뭔가 일이 발생하긴 한 모양. 200만 원을 받으면 95만 원이 고정지출로 빠져나가는 내 삶에서 근근이 아껴온 저축을 깨긴 싫었지만 부리나케 ATM으로 달려가 현금을 뽑고 장을 봤던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여유가 생겨 본 뉴스에서는 점유율이 무려 90%에 달하는 두 통신회사 Bell과 Rogers 중 로저스의 시스템에 먹통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필이면 이 회사가 전화사업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은행에다 국가사업까지 손을 뻗친 탓에 공항과 구급차 업무에도 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으며 다른 워홀러들, 특히 오늘 도착했을 사람들을 걱정하는 찰나 문자가 울렸다.



"루퍼스(로저스의 오타일까)가 전국적으로 다운되었고, 네가 주급 날까지 간당간당 사는 거 알아. 혹시나 돈이 없다면 입금될 때까지 가게에 들러 좀 빌려가렴. 절대 배고프게 살지 말고!"


혈혈단신으로 온 캐나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지만 반대로 보면 정보 면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였기에 노력 여하에 따라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 하다못해 비정기적인 단수나 예금이자 하락, 화재경보기 검침 같은 일상의 변화에도 촉을 곤두세우는 생활에서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우는 건 다른 사람의 호의. 이미 잔고도 깼고 배도 채운 후였지만 이분의 문자는 울컥함과 함께 마음까지 채워주었다. 쿠키나 간식, 달력, 재고로 남은 옷, 어쩔 때는 알레르기약까지 꾸준히 챙겨주시던 사장님. 심지어는 삼 개월을 채운 후 임금인상 협상이 가능하다며, 그런 법을 귓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최저임금인지라 그다지 희망을 품지 않았던 내게 예고 없이 시급을 올려주시기도 하셨다. 좋은 직장을 찾으려면 오래 일하는 사원이 있는지 알아보라더니, 20년 넘게 근무한 G가 있는 이곳이 그런 직장 아닐까.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

휴식시간에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수다를 떨었던 C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이미 한 말을 여러 번 하는 그녀의 버릇답게 저 명언을 귀에 얹히도록 들으며 나는 마찬가지로 이곳이 나 하나를 키워주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장님은 물론이거니와 직원들도 언제나 배려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 당장 사장님보다 더 오래 일한 G만 하더라도 매니저 급이지만 정원사 출신답게 다른 직원들이 꺼릴 만한 궂은일만 골라하고, 내가 몰래 가게의 역사책을 읽자 그다음 주에 빅토리아 역사책 두 권을 빌려주셨다. 십대부터 칠십대에 이르기까지 배려가 몸에 배고 언제나 내일의 동료를 위해 오늘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외로워서 어리광을 부리는 내 강짜에 때로 휴일에 만나 같이 밥을 먹어주는 동료들도 있었다. 여행에 동참하거나 깜짝 선물을 준다거나 내 버스 시간에 특히 신경을 써준다거나. 정말로 직장 외에 사람 만날 일이 없고, 대부분의 휴일을 고독하게 보낸 나를 위해 이들이 짬을 내어 건네준 호의는 언제나 내가 외로움의 저 끄트머리에 가 있을 때마다 나를 일상으로 데려온 원동력이었다.

워홀 초반, 지인의 지인의 지인으로 만난 분께서 동료는 친구가 아니라며 신신당부하신 적이 있다. 안에서 아무리 친해도 직장 밖에 나서는 순간 선이 명확한 캐나다. 그럼에도 동료들을 볼 때마다 친구라는 명확한 정의 없이도 스스럼없이 친절을 베푸는 이들에게 애정을 느낀다.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

가장 힘들다는 한 달 차에 오히려 향수병을 멀리 멀리 날려 준 이야기. 일한 지 정확히 2주 차에 있었던 Good Friday(부활절 연휴 전날 금요일), 남들 놀 때 일하는 관광업계 사람답게 하루를 보내고 식료품점에 들러 이것저것 샀는데 막상 카드결제가 막혔다. 지쳐 보이던 얼굴의 직원이 한없이 따뜻하게 세 번 정도 기회를 주었어도 무마되는 시도에 어떻게 상황을 타개해야 되나 혼란스러운 와중, 저쪽 계산대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자그마치 45달러에 달하는 값을 대신 지불하고 떠난 아저씨. 쿨하게 자신의 트럭에 시동을 걸며 퇴장하는 그에게 당신이 나의 성 금요일 선물이라며 감사인사를 외치자 명언만 남기고 가셨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해 줘."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 뒤에 C는 항상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자라난 아이는 다시 마을에 공헌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로 이 천사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음에도 반대급부의 선행을 하지 않아 마트에 들를 때마다 부끄러웠던 지난날, 방 안에서 찜찜함의 이유를 생각해보니 '돈을 모아 마지막에 같은 금액을 기부하고 떠나겠다'는 발상은 도울 여력이 있으면 돕겠다는 조건부 다짐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한 번에 내놓기엔 큰돈이라 여기서도 드문 일이지만 그만큼 행운을 받은 사람으로서 조금씩 갚아나가지 않은 건 어불성설. 시급이 오른 지난주, 드디어 같은 마트를 나오며 20달러를 기부했다. 우습게도 소감은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은 느낌뿐. 다만 조금 홀가분했다. Donation이란 단어가 행사나 관광, 교육과 쇼핑 곳곳에 녹아있는 이곳, 받은 만큼은 못하더라도 호의의 작동원리에 가담해보는 건 어떨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육 개월 생활을 총망라하며 글을 끝낼 무렵, 퇴근하는 버스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만 지나치게 지친 육체는 불안감에 내줄 마음 한 켠조차 없어 하차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리듬에 따라 걷는데, 뒤에서 계속 누군가가 소리친다. 설마가 역시나였나 싶어 뒤 돌아본 그곳엔 어느샌가 가방에서 떨어진 나의 열쇠를 들고 따라온 옆 자리 사람.

아무리 편견이 없어졌다지만 카트를 끌고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가끔씩은 약에 취한 홈리스들을 주의해야 하는 북미지역에선 옷차림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수염을 기다랗게 기르고 주렁주렁한 복장을 걸친 그가 커다란 소리로 떠드는 옆자리에서 얼마나 냉담한 태도로 있었던가. 야심한 밤 열쇠가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 나를 위해 목적지가 아닌 데도 버스에서 내리고, 다시 운전하는 버스를 잡으러 가는 그의 뒤에서 낼 수 있는 힘껏 커다란 목소리로 땡큐를 외쳤다. 그리고 정류장이 아닌 데도 서서히 멈춘 버스.

캐나다 대륙 전체를 일반화긴 힘들겠지만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단 인상을 많이 받는다. 아무래도 아무 인연 없는 사람들의 선의를 매일 맞닥뜨리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의심이 신뢰로 바뀌는 동안 계속 들었던 생각, 같은 상황에서 나는 과연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가. 그날만 하더라도 집을 향하던 나의 놀라움은 어느새 부끄러움으로 점철되어 갔다. 특히나 머릿속에 스쳤던 것은 가게에 자주 찾아와 돌을 만지작거리던 남자. 그 사람도 어딘가에선 누군가의 열쇠를 주워주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한국인 도와주는 것도 한국인

슬프게도 한국인이 밖에 나갈 때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은 같은 한인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당연히 여기서도 존재하는, 그것도 소름까지 돋는 악덕업주 이야기를 듣는데, 룸메이트 분이 그러셨다.


"근데 막상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같다? 선진국에서 왔다고 다른 건 아니더라. 그리고 결국 한국인 등쳐먹는 것도 한국인이고, 그거 도와주는 것도 한국인이야."


그 말의 산증인이던 나의 룸메이트들, 피차 바쁜 삶이라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을 일은 없었지만 생활 면에서 자주 도움을 받았다. 특히 정착할 때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밥솥 같은 생필품부터 정리나 청소에 관한 것까지. 내가 적어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같이 사는 사람의 손길이 아주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걸 동거를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엄마의 절친의 조카라는 구구절절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B씨네 가족도 있다. 여기 생활의 반은 이분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게 가족 같은 보살핌을 주신 분들이다. 해틀리 캐슬과 근지의 계곡, 세 번의 바다, 다른 한인 분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던 일이나 따님과 도끼를 던지고 놀았던 추억까지. 사회 문제에 지식이 해박하시고 젊은 세대의 잘잘못에 본인들 세대 탓을 하시던 B씨, 유난히 마음이 맞던 M 언니, 이게 바로 캐내디언 학생인가 싶을 정도로 침착하고 야무진 S. 늦은 시간에 일을 끝내고 인기척 없는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외로움에 잠길라치면 초대 문자로 날 구원해준 정성에 감사하다. 이제는 안다. 나쁜 한인 이야기만 많은 이유는 좋은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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