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현실?
작가가 되어야지, 원금의 몇 배로 돈을 불려야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야지, 삼십권 이상 책을 읽고 복근을 만들어야지... 캐나다 워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상들이 널린 와중에도 내가 세웠던 계획의 목표들이다. 워홀 트렌드가 변했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 건지 살인적인 집세와 물가 때문에 호주로 간 사람들이 반년 오백 모을 동안 이백, 삼백 모으게 생겼다. 게다가 생활이란 어찌나 지리한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영문법 반시간, 운동 반시간, 샤워 반 시간, 1000자 쓰기 하다 보면 밥 짓고 설거지할 시간조차 빠듯하다. 겨우 돌아오는 휴일에는 장 보고 청소하느라 기껏 사서 온 이북리더기를 켜 놓고 잠들 때도 있다. 영어공부라도 게을리할라치면 하루 쓰는 영어의 분야가 한정되어 있기에 멈출 수가 없다. 캐나다의 유일한 장점인 영주권은 어찌나 멀어 보이는지. 미용, 용접, 회계, 마케팅 등의 기술이나 2년 이상의 경력이 없는 내겐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퇴근하고 돌아온 야심한 밤 어쩌다 좌절감이 엄습하면 당연히 드는 생각, 왜 왔지. 지금까지 우는 소리를 읽어내신 여러분도 같은 의문을 품겠지만 그럼에도 발악처럼 하는 대답.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결정을 하겠습니다.
감사하며 삽시다
자기 계발서나 찬송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소리야 싶겠지만 정말로 감사하며 사는 나날이다. 잔소리를 하시다가도 밥시간만 되면 퍼뜩 식탁으로 모이라던 엄마, 이곳의 절반 가격이던 외식 물가, 카페라는 이름으로 온갖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던 놀이 문화, 애초에 걷다가 지치면 들어갈 곳이라도 있던 한국의 상권까지. 당연하게 세탁기가 자리잡고 주방과 화장실을 혼자 사용하는 원룸형 주택들은 일인가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 모든 편의와 작별인사를 나눈 나로서는 어쩌다 버스가 일찍 도착한 일, 근처에 쇼핑센터가 있는 것, 햄버거 가게는 그나마 늦게까지 영업해 주는 것, 오늘따라 파스타가 맛있는 일 등으로 하루치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결국 열악한 상황에서 예전을 그리워하는 것 아닌가 긴가민가한 사람들도 있겠는데, 그런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선 가깝고 한국에서 먼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작은 앞마당이 깔린 집들, 오분만 걸으면 공원 수준으로 너른 들판을 갖춘 이웃 학교, 사 면이 둘러싸인 덕에 평생 볼 바다를 미리 보나 싶은 근거리 해변들. 자연의 광활함이 내 마음가짐까지 넓혀준 까닭인지 결핍은 줄고 이전에는 당연하던 일을 바라보는 시야는 늘었다. 게다가 길을 비켜줄 때나 버스에서 내릴 때 항상 Thank you를 외치는 사람들,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안락한 진공
그렇다고 일상의 감사함이 워홀의 진수라기엔 지나치게 메리트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 하나 더, 굳이 오랜 기간 살던 곳을 떠나는 이유는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 3>에서 말했던 호캉스를 떠나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오래 살아온 공간의 상처를 떠난다'던 의견, 워홀은 말하자면 아주 길고 긴 호캉스일지도 모른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정보 접근 면에서 노력하지 않으면 배제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는데, 반대로 말하자면 장점도 된다. 의도치 않게 바뀐 밤낮은 소식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하다못해 같은 뉴스를 접해도 모국어로 접하는 충격과 외국어로 읽는 거리감은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원체 여유롭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평온한 데다가 건조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적인 질문과 간섭을 일절 하지 않는 캐나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은 선은 내겐 아늑한 온실 같기도 하다. 막 너머로 보는 다른 이의 삶은 저마다의 속도를 가지고 있으니, 급해지지 않는 건 덤. 다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염원하던 자기만의 방을 가진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거리감 아닐까.
너희 계속 캐내디언처럼 굴래?
조금 재수 없지만 뼈 있는 농담. 나와 J가 하나 있는 의자를 휴식시간에 계속 양보하자 사장님이 하신 말이다. 사회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는 푸념이 나온다는 밴쿠버와 달리 시골의 정겨움과 사람들의 당연한 양보가 주를 이루는 빅토리아에선 그들의 시민의식에 대한 자부심까지 엿볼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부터 배려하는 버스, 길 걷는 행인만 보면 속도를 줄이는 자동차들, 혹여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닿을까 봐 저만치서부터 사과 인사를 건네고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프라이버시가 가장 중요한 이곳에서 내가 느낀 건 오히려 사람의 정이었다. 덕분에 새삼스러울 정도로 나의 지난날과 우리나라에 대한 신뢰와 사랑까지 마음에 자라나는 걸 느끼는 매일매일이다. 외국에서 받은 호의가 어떻게 멀리 떨어진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전이되냐고 딴지 거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결핍이 채워지니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더라.
돌아가면 두 살을 더 먹지요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은 건 시차. 금요일에 떠난 나는 비행기와 배와 택시 두 번을 타고 다시 이곳의 금요일로 안착했다. 열여섯 시간을 번 셈. 게다가 스물여섯이었던 나의 나이도 여기서는 스물다섯, 해가 바뀌고 비자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스물다섯이다. 언제 돌아오냐느니 시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느니 정신 차리라는 등의 잔소리는 아름다운 나이 스물다섯의 필터에 걸려 걱정스러운 애정만 남는달까. 열아홉 살 J, 사십 대 E와 초코바를 먹으며 황혼 지는 항구를 바라보고, 육십에 가까운 C에게 트럭에서 갓 나온 아이스크림을 얻어먹던 나날. 여기로 워홀을 온 뒤로는 귀에 얹히도록 들은 대학-취업-결혼-육아의 사박자에 스스로 안단테를 그려 넣은 것 같다. 한 살의 위력이 이렇게 빠른 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다스베이더 씨만 볼 수는 없는 노릇. 비행기를 내리는 순간 스물일곱인 나는 다시 사회의 흐름을 타야 한다. 무섭냐면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조금의 확신과 낙관, 여유를 가지고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무책임한 말로 무마해서 죄송하다. 다만 일상에서 발견한 워홀의 매력은, 기껏 면을 삶고 재료를 볶아놨는데 파스타 소스에 곰팡이가 핀 걸 발견하는 출근 사십 분 전이 거의 매일 반복되는 나날을 어찌저찌 뚫고 가는 것에 있다. 주저앉았다가 추진력을 얻으러 점프하는 클리셰처럼, 이 생활도 내겐 좋은 발판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