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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2. 2022

동쪽으로 가자

흔한 실패담

한 눈 팔지 않고 반 년을 열심히 살아낸 성적표는 기가 막힐만큼 보잘 것 없었다. 일주일도 안 되어 일을 시작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했지만 엄청난 추억이나 청춘이라면 꿈꾸는 아름다운 로맨스, 매일이 즐거운 다국적 친구들과의 우정 같은 시나리오는 맛보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처럼 유학원을 통한다든가 웹사이트에서 동행을 구하지 않아 대부분의 나들이엔 나 혼자였으니 지독한 고독에 몸부림을 쳤을 뿐. 차라리 술을 즐기는 파티광이었다면 훨씬 신나는 하루하루였을 것이란 지점까지 후회가 미친 이유는 아마 기대만큼의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일 것이다.

짬을 내어 쓴 소설은 빛을 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엔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생활비의 장벽이 높았다. 연령대 높은 동료들의 여유와 너그러움은 나를 보듬어 주었지만 한국처럼 즉흥적인 회식이나 개별만남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팔월 말, 휴가까지 얻어 미리 브런치북 공모전을 준비했더니 막상 대회의 기간이 너무 길어 긴장이 풀린 것도 한 몫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은 어찌나 여실한지, 나는 놓친 풍선처럼 어영부영 구월 초반을 보내고 결국 몸살에 시달리고 만다.


도시에서 태어난 자 도시에서 거두리라

토론토행 티켓을 예약한 날에는 우연찮게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캐나다의 겨울을 버틸 자신이 있느냐, 늦은 나이로 한국에서 어떻게 시작하려 그러냐, (여자 워홀러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는지) 불건전한 일자리도 있다는데 조심하지 그러냐 등등... 언제 정신차리냐는 뉘앙스의 통화를 끝내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과 사색에 잠겼다. 나이를 묻는 것조차 무례인 이 곳과 한국의 속도는 기가 막히게 달라서 어느샌가 존재를 잊어버린 초조함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영주권이 요 몇 년간 쉬워질 것이란 소식에 겸사겸사 들른 캐나다, 막상 와 보니 삶의 형태에 큰 차이는 없고 한국-그 중에서도 서울-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육개월 간 소매상의 충성스러운 직원으로 일했지만 서비스며 물건의 품질이 절대 여기가 낫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선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이 아니랄까. 사람들 사이의 간격과 관계의 꼬여있지 않음, 느슨한 사회 분위기가 캐나다에 와서 느낀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으니 말이다.

이룬 것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빅토리아의 생활에 완벽한 만족을 느낀 것도 아니면서 당장 한국에 돌아가기도 애매한 상황. 그게 내가 토론토를 선택한 이유였다. 룸메이트가 토론토행의 동기를 물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이 그리워서 그랬다는 답변이 여러분에게도 답이 되었을까. 눈이 팽팽 돌아가는 속도, 좁은 공간에 우겨넣어져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 기인과 평범한 사람이 타인이 되어 섞인 도보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평지. 빅토리아에서 가장 향수를 느꼈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술주정뱅이의 노랫소리에 깨었던 새벽이었다. 바다고 자연이고 실컷 봤으니 취객의 술주정을 그리워하는 나로서는 도시로 가는 게 맞지 않겠는가.


끝까지 간다

갈수록 더 많은 의지가 되는 지인 B씨 가족의 초대를 받는 날이면 오랜만에 겨우 쓰는 한국말로 말문이 터진다. 한참이나 어린 나를 배려해주시는 덕에 우리 세대의 유행부터 캐내디언 사는 이야기에다 가끔씩은 사회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까지 지루할 틈이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언젠가 M언니가 해줬던 이야기. 이곳 사람들이 갭 이어(Gap Year-학생이나 직장인이 휴학, 휴직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기간)을 가진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 중 건너 아는 한 남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차를 한 대 사서 북미를 횡단한단다. 지금부터 여행 시작이라며 차와 찍은 사진을 의기양양하게 SNS에 올렸다는 일화는 소위 '대륙의 기상'에 대한 부러움을 새삼스럽게 일깨웠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움과 서부 역사로 내려오는 개척정신, 그리고 시도만으로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 분단 이후 점점 갈라파고스화 되고 있다는 한국이지만 정말로 젊음만 가지고 넘어오는 한국인들을 보면 대륙과 반도, 근성과 도전정신의 차이는 아닌 듯해서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많은 실패담에 대한 갈망으로 나아갔다.


B씨 가족과 함께한 한낮의 티타임. 빅토리아에서의 행복했던 추억 중 하나이다


두 달 전 유럽으로 돌아가는 E의 방을 빌리기 위해 연락을 주었던 갓 스무살 한국인. E는 그녀를 소개하며 4년제 대학을 다니면서 홀몸으로 와 풀타임 근무를 하는 성실한 한국인이 또 한 명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정작 그런 사람은 국내에 차고 넘쳐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젊은 나이에 외국에 나가는 등 이색적인 경험이 있으면서 대학 졸업은 해야 하고, 이십대 안에 취직을 하는 정통 경로-개인적으로는 어려운데 사회적으로는 남들 다 하는 것 같은 우리의 현주소다. 그렇기에 기껏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 와서도 용감하다는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나의 의식 어딘가에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채찍질만 죽어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까마득한 방황의 길로 들어서나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방을 빼고 짐을 쌌다. 끝까지 가보면 성공이든 실패든 뭐라도 남겠지. 잘 된다면 요행이고 안 된다면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그때쯤 되면 잡히지 않는 꿈에 대한 포기도 충만해진 마음으로 쉬이 할 테고 말이다. 언젠가 지금을 돌아보면 무엇이 남을까. 텅 빈 잔고, 왕성해진 식탐, 고독과 이별, 시큰거리는 손목과 발바닥, 마침내 찾아온 허리통증 말고도 잊지 못할 무언가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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