쌉쌀한 도시의 맛
동료의 한 턱과 지인 가족의 여행 및 식사 초대, 록키 여행, 사장님의 라이드와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의 호의까지. 반 년의 빅토리아 생활을 정리하던 그 시기는 정말이지 황홀했다. 하다못해 보안 직원까지 친절한 빛의 통로를 빠져나와 비행기에 몸을 싣자, 맨 끝인 내 좌석이 보였다.
좋게 말하면 조용하고 나쁘게 말하면 퉁명스러운 남자와 화장실의 가운데 좌석. 네 시간의 비행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했을 때 느낀 짜릿함이란... 은 곧 이어진 무기한 대기에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외국인도 자국민도 할리우드도 혀를 내두른다는 에어 캐나다. 그날도 악명을 몸소 보여주겠다는 것인지 끊임없는 안내가 울려 퍼졌다. 피어슨 공항의 체크인 문제로 잠시 딜레이 됩니다, 한 시간 정도 딜레이 됩니다, 일단 아홉 시 반까지 기다리겠습니다- 8시 40분쯤 되었을 때 승무원들은 애써 웃으며 그래놀라 바와 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탑승 전부터의 정적을 견디다 못한 나는 옆 자리 남자에게 농담을 던지고야 만다.
"운이 좋네요, 공짜 간식도 얻고."
"예."
아아, 이게 바로 차가운 도시남자란 걸까. 빅토리아의 넉살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재빨리 물을 받고 다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문이 열리고, 겨우내 짐을 찾고, 택시를 타고, 그래도 따뜻함을 기대하며 홈스테이 집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앞엔 좁디좁은 계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끝이 없네, 끝이 없어!
여기는 캐나다. 나의 일은 나의 일, 남의 일은 남의 일. 마음껏 도움을 기대하지 못하는 문화도 문화거니와 계단에 설치된 의자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홈 맘은 허리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 그녀의 지휘 하에 어찌저찌 이층까지 당도한 내가 발견한 것은 또 하나의 계단이었다.
"당신 방은 3층이에요. 정말 아름답지만 짐 많은 사람에겐..."
아하. 급기야 세 번째 손톱을 깨뜨리며 나는 다른 짐은 내일로 미뤄 버렸다. 그날 밤, 여러모로 힘든 하루였음에도 내가 세운 다음 날 계획은 이러했다. 이력서 작성, 교통카드 구입, 구직과 룸 뷰잉...
다음 날 아침 나는 한인 카페의 무한한 로딩 끝에 절망을 삼키다가, 카카오 서버가 다운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다.
아. 비행기에서, 노면 전차와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읽은 책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여서 다행이었다. 우주의 혼돈 속 보잘것없는 인간의 존재를 조명하는, 그럼으로써 이상하게 위안이 되는 그 책이 아니었다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던 요 며칠을 어떻게 버텼을지 상상도 안 간다. 애매한 거주 기간 때문에 방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길을 잃고, 도무지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는 교통시스템에 고통을 느끼며, 마침내는 전부 포기하고 들어간 관광지에서도 두 시간 뒤에나 찾아오라는 통보를 들었으니까.
그때 내가 할당한 매일 식비는 20달러였다. 그러니 제멋대로인 외식을 삼가야 했지만, 고통의 전이가 어쩌다 배고픔으로 이어졌는지 무작정 햄버거집 문을 두드렸다. 야외 패널 광고 9.9달러, 내 영수증 15.4달러. 계산 후 발견한 직원의 실수와 비틀비틀한 나의 걸음걸이, 급기야 감자튀김을 쏟고 옷에는 겨자소스가 잔뜩 묻고... 외로움과 불확실 속에서는 아무리 맛있는 햄버거를 씹어도 우울한 법이다.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운동을 했는데, 아무래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 속에서 그나마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마음을 놓는 시간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이 무너지는 걸 보기란 몇 번을 겪었든 사실은 착잡한 법이다. 전날의 실패에 당분간은 관광으로 눈을 돌린 나의 원대한 결심 또한 그랬다. 세인트 로렌스 마켓으로 향하는 전차 정거장에 십 분 정도 서 있으려니 아주머니 두 명이 와서 물었다.
"혹시 버스 기다리는 중이에요? 우리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라톤 때문에 정류장이 폐쇄되었거든요."
어째서 그 말을 새 정류장 위치를 알려달란 부탁으로 착각했을까. 이제 막 와서 아무것도 모른다며, 심지어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대답으로 일관하던 나는 잠시 후 깨달았다. 아, 내 정류장도 닫혔겠구나! 부리나케 다른 버스를 찾았다만 글쎄, 이 놈의 교통 시스템은 어찌나 말썽인지 끝없는 지연 끝에 폐장 시간을 넘기고 나는 눈물을 삼키며 차이나 타운으로 향했다. 이후의 지연과 노선 변경은 괴로웠을 뿐이니 굳이 덧붙이지 않겠다.
이미 여섯 시가 훌쩍 넘어 당도한 그곳은 활기찼으나 마음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결국 큰 대로 두 개에 지나지 않았던 데다 곳곳에 붙은 폐점 사인이 어딘가 씁쓸함을 주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이윽고 들어간 켄싱턴 마켓 골목에서 퇴폐와 불량, 마약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빈속에 싸구려 만두를 욱여넣고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밤의 전차에 몸을 실었다.
화장실이 예뻐서 다행이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룰루 밀러가 사회의 음습한 비밀과 위인의 기만, 그리고 존재론적 회의로 길을 잃는 동안 나 역시 어둠 속에서 한참을 벽난로가에 앉아 있었다. 항상 최악을 대비해도 막상 겪는 불안엔 약이 없는 법. 빅토리아 생활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그제야 실감 났다. 그렇다면 이제 불운의 타이밍이 찾아온 걸까 꼴사나운 상념에 잠긴 나를 깨운 건 엄마의 통화였다. 드디어 연결된 페이스톡에선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운이 좋니. 너 거기 도착한 날 카톡 마비됐다고 생각해 봐. 그날 내내 우리는 네 걱정만 했을 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는 말이다, 순간 지난 이틀이 스쳐 지나가며 손을 내밀어 준 여기 사람들이 떠올랐다. 저녁을 대접한 집주인, 프린트기 사용법을 알려 준 도서관 사서, 교통 통제를 알려주려던 아주머니... 따지고 보면 토론토는 정말로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곳이지만 그건 내가 도시 중심부에서 누리던 풍요로움에서 나와 주변부에서부터 이방인 신분으로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절대 못 겪었을 일들, 이를테면 편도 한 시간을 넘는 거리와 위험이 도사린 골목 등을 나는 평생 모를 수도 있었겠지. 그러니 눈을 감고 편안한 내 방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는 건 나를 믿어준 이들, 도시의 혼란에서 구해 준 사람들을 기만하는 미숙함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직은 물이 잘 내려가지 않지만 천장에 창을 달아 밤이면 별을 보며 목욕을 하도록 설계된 곳, 여기서의 유일한 위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