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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아 Oct 18. 2024

엄마는 전생에 청개구리였던 게지

새 지갑 줄게 헌 지갑 다오



사람은 청개구리와 매우 밀접한 동물인 것 같다.


이거 해라~

하면 이건 하기 싫고


저거 해라~

하면 저거 말고 아까 그거 하고 싶고


그거 하지 말아라~

하면 그건 반드시 꼭 하고 싶어지니 말이다.


전생에 청개구리들이 다음 생에는 죄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특별한 경로라도 있는 것일까.


나도 전생에 청개구리였던 게 분명하다.


중고등 시절 엄마가 "방 좀 치워라."

하고 말씀하시면 청소가 끔찍이도 하기 싫었다. 자고 일어나면 맨날맨날 해야 하는 청소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이 공부가 백 배 천 배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사귀게 된 남친이 있다며 친구 모드를 장착한 엄마에게 잠시 친구인 줄 착각하고 털어놓았더니 딱 촉이 오셨는지 엄마의 한 말씀. "그 남자는 만나지 말아라."라고 하시기에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남자는 다 죽고 내 남친 혼자만 살아남아 우리 둘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주변의 반대 때문에 우린 더욱 열렬히 사랑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가 엄마 자리에 꿰차고 앉게 되고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시켜야 할 때가 오면 가끔 나는 어릴 때 나의 모습이 떠올라 강압적인 명령문은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노력만 했다.


빨리 자라.

라고 말하면서도 나도 이렇게 안 자고 버티면서 마치 내일은 없을 것처럼 이 시간을 조금만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어린 저 아이들이야 오죽할꼬 하는 마음에 말하면서도 내심 찔렸고


책상이 무슨 쓰레기장이니 좀 치워라.

이야기하다 보면 어릴 적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아, 유전자 어디 안 가는구나 싶었다. 남편은 굉장히 깔끔한 성격인데 깨끗함과 지저분함이 대결하면 지저분함이 이기는 건가 하고 뭔가 되지도 않은 깨달음도 얻었다.



언젠가부터 점점 현금을 쓸 일이 줄어들었다.

플라스틱 카드가 나오면서 그 안에 한도를 넣어줄게 즐겁게 소비하고 한 달 후에나 갚으렴 하고 친절하게 유예기간까지 주니 안 쓰면 손해겠다 싶어 마음껏 신나게 카드를 썼다. 무이자 3개월, 무이자 6개월 할부라는 말에 원금 생각은 접어두고 무이자라는 말에 꽂혀 카드를 긁고 지르는 것에 맛들려 점차 현금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현금을 가지고 다닐 일이 없으니 지갑은 홀쭉해졌다. 카드는 신용카드뿐 아니라 도장 몇 개 적립하면 혜택을 드려요 하는 카페, 미용실 등의 적립카드도 우후죽순 생겨났으니 지갑은 어느새 현금은 찾아볼 수 없는 카드 수납고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무겁기만 한 동전은 빨간 돼지저금통에 쨍그랑 소리 나는 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카드를 휴대폰에 넣을 수 있으니 카드 실물은 들고 다닐 필요 없이 휴대폰만 들고 다녀도 된다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신기한 건 또 참지 않지. 나도 대세에 따라 삼성페이를 이용하게 되면서 나의 빨간 지갑은 고대유물이 되어 서랍 속에서 잠들게 되었다. 빨간색은 돈이 들어오는 색이라길래 많이 튀긴 해도 빨간색 지갑을 장만해 들고 다녔는데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무리 돈이 들어오는 색이라 해도 튀는 건 질색이라 더더욱 그 지갑은 들고 다닐 일이 없었는데.




빨간 지갑이며 장지갑을 넣은 조그만 상자를 베란다에 고이 모셔둔 것을 딸이 발견했다.

변변한 지갑이 없던 딸이 자신이 써도 되냐고 묻길래 잠자고 있는 지갑을 자꾸만 재우면 숲 속의 잠자는 공주로 변할까 봐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딸의 시선이 줄곧 지갑에 꽂혀있길래 나도 같이 시선을 보탰는데 그야말로 오랜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지갑이었다. 빨간색으로 광이 반짝이는 겉 재질은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그런지 조금 끈적한 느낌이었고, 동전을 넣어 딸깍 잠기는 고리는 잠기기는 했지만 뭔가 헐거웠다. 사용감이 엄청난 지갑인데 너무 좋아하는 딸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지갑을 수중에 넣게 된 딸은 사용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1년 이상을 써오는 중이다. 내 젊은 날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샀던 사랑스러운 고양이 이름의 지갑이지만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며칠 전 딸에게 넌지시 물었다.


딸~ 생일날 엄마가 지갑 사줄까?

응? 나 지갑 있는데?

으응. 그건 좀 낡았잖아.

에이, 뭐 어때. 괜찮아. 난 좋아.


딸은 괜찮다고 쿨하게 넘기는데 쿨하지 못한 나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청개구리병도 도졌다. 괜찮다고 사지 말라는데 그 말과는 반대로 사 주고 싶은 마음.


중 1이면 아직 카드보다는 현금이 더 익숙한 나이이니 지폐와 동전을 잘 넣어 다닐 수 있는 지갑을 이 청개구리 엄마는 꼭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 지갑을 들고 마음에 쏙 든다며 환희 웃는 딸아이의 미소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딸... 근데 혹시 엄마의 청개구리 습성을 미리 알고 안 사줘도 괜찮다고 말한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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