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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음식의 저편 20240309

by 지금은

글쓰기 수업 시간입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다음 시간 전날까지 과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음식”을 주제로 한 글 한 편입니다. 간단한 예시를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음식, 눈물에 젖은 음식, 엄마의 레시피, 해외여행에서 먹어본 음식, 추억이 담긴 음식, 나만의 레시피 등입니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음식은 뭘까?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예시를 보면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음식 없어요. 눈물 젖은 음식 없어요. 엄마의 레시피 특별한 것은 없지만 먹고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어요. 해외여행에서 먹어본 음식 그냥 그래요. 혐오 음식이 아니라면 특별히 거부감이 없어요. 추억이 담긴 음식 없어요. 나만의 레시피는 더더욱 이야깃거리가 될 게 없어요. 하루를 꼬박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남처럼 음식을 탐하는 것도 아니고 맛집을 찾아다니지도 않습니다. 먹성이 좋아야 추억담도 있을 터인데 어렸을 때는 먹는 것을 소나 닭 보듯 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는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탈을 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은행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오니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이렇게 쌀쌀한 날에는 뜨거운 국물이 있는 게 최고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습니다. 건널목을 건너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오늘은 휴업이라는 팻말이 문 앞에 걸려 있습니다. 값도 저렴하고 맛있는데 하며 여운을 남깁니다. 이왕 칼국수를 먹기로 했으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밀가루 음식인 만둣국을 먹었습니다. 아내는 아무래도 국수가 미련이 남는가 봅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애호박과 칼국수를 샀습니다. 바지락도 샀습니다.


“그 맛이 아닌데.”


“뭐가?”


휴업이라고 팻말이 걸린 집을 말합니다. 전문가는 뭔가 달라도 다른 게 분명하답니다. 그게 그거지 뭐 하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음에 들리며 좀 더 관찰을 해봐야겠다고 합니다.


담장에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애호박이 열렸습니다. 반딧불이가 돌담을 넘나들고 호박잎 사이를 들락거리며 하늘의 별들과 숨바꼭질을 합니다. 어린 시절 고향집 마당입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점심이 지나자 분주해졌습니다. 귀한 밀가루가 어디에서 났는지 함지박에 쏟고 물을 뿌려가며 반죽합니다. 얼마나 치댔을까요? 둥그런 밀가루 덩이가 되었습니다. 두레반을 펼쳤습니다. 두 뼘 굵기의 홍두깨가 나왔습니다. 양팔 길이입니다. 반죽이 홍두깨에 밀려 펼쳐집니다. 시간이 지나자, 밀가루 반죽이 두 아름 정도의 넓이로 얇게 펼쳐졌습니다. 반죽을 밀어내는 사이사이에 밀가루를 골고루 뿌립니다. 홍두깨에 달라붙지 말라는 뜻입니다. 드디어 펼쳐진 반죽을 접고 접었습니다. 이번에는 큰 도마와 부엌칼의 대령입니다. 어머니의 일이 끝나자, 할머니가 칼을 들었습니다. 겹치고 겹친 반죽을 싹둑싹둑 일정 간격으로 썰어냅니다.


어느새 어둠이 찾아옵니다. 가마솥에 물이 끓고 채를 썬 애호박과 감자가 들어갔습니다. 국수가 뒤를 따랐습니다. 솥뚜껑을 덮자 허연 김이 오르고 물기가 서려 뚜껑의 틈을 비집고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바가지에 의해 국수가 판재기에 한가득 옮겨졌습니다. 아버지, 삼촌, 고모, 우리 형제들의 순서로 그릇에 옮겨졌습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국수라 모두 즐거운 분위기입니다. 맛있다는 말이 마당에 펼쳐진 멍석 위에 가득합니다. 나만 말이 없습니다. 먹는지 마는지 하늘의 별을 올려다봅니다. 마당을 날고 있는 반딧불이를 따라 눈이 움직입니다. 음식을 반쯤 남긴 채 일어섰습니다.


“더 먹지 않고.”


고모의 말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까지만 해도 음식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 잠시 이모 댁에 기거한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내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명절 때 찾아뵈면 너는 뭘 먹고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제는 뭐든지 잘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늘 건강에 관심을 가진 때문인지는 몰라도 점차 소화불량이 사라졌습니다.


‘그럼 특히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요?’


그런 거 없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습니다. 정년퇴직하고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는 잠시 세끼 찾아 먹는 남편이 된 때도 있습니다. 아내가 눈치를 준 일은 없지만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음식 타박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전에는 돈을 벌어온다는 유세로 가끔 타박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을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아내의 음식이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음식 레시피를 검색하여 색다른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든 데 대충 먹기로 해요.”


맛집을 찾아가지는 않아도 눈에 넣어둔 바지락칼국수를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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