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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겨울 소나기 20240217

by 지금은 Feb 28. 2025

날씨가 잔뜩 흐렸습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저녁부터 비가 올 거라고 합니다. 누군가 2월은 썩은 달이라고 하더니만 하늘이 자주 흐리고 일기가 불순합니다. 기온이 가파르게 시소를 탑니다. 어느 사이에 20도 가까이 오르더니만 영하로 곤두박질을 치기도 합니다. 마음을 오락가락하게 만듭니다. 아직 겨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봄이라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엊그제는 날씨 변화가 심했습니다. 비가 내리더니만 진눈깨비로 변하고 다시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물녘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햇볕이 쨍 났습니다.


잠시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기에 공원이라도 한 바퀴 돌까? 하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중간쯤 지났을 때입니다. 갑자기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흩날립니다. 비와 눈이 섞여 하늘을 뒤덮는데 주위의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빗방울과 눈이 함께 얼굴을 때리며 목덜미로 달려듭니다. 모자를 쓴 게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머리칼이 없는 정수리를 적실 뻔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옷이 물방울에 갇혔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가까이에 있는 그늘막으로 피했습니다. 모자를 벗어 앞자락이며 어깨와 등의 물기를 털었습니다. 바짓가랑이의 물도 털어냈습니다. 대단한 진눈깨비입니다. 여름철 소나기를 연상합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쓸데없는 후회를 합니다. 작은 우산이라도 가지고 나와야 했는데 하고 말입니다.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의 어머니 마음이 됩니다. 어느 때는 우산을 가지고 왔다고 후회합니다. 빗방울이 곧 떨어질 것 같아서 우산을 가지고 나왔는데 하늘이 곧 먹구름을 밀어냈습니다. 밖에 다니는 동안 긴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거추장스럽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우산을 든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창피한 생각이 듭니다. ‘뭐 날씨도 확인하지 않은 거야.’ 혼자만의 괜한 자책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낯 모르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두겠습니까.


오늘은 심심하게 생겼습니다. 곧잘 지니고 다니던 책을 빠뜨렸습니다. 우산을 챙긴다고 가방을 잊었습니다. 작은 손가방 속에는 늘 책 한두 권이 잠자고 있습니다. 나에게 지하철은 독서의 장소로 좋습니다. 경로석에 앉아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덜컥거리는 차의 움직임은 나의 주의집중을 흩어놓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많으니 자연스레 몸가짐도 조심하게 됩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앞사람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쑥스러운 생각에 곧 눈을 외면했습니다. 눈을 아래로 깔았습니다. 손에 쥔 우산이 보입니다. 빗물받이 보호용 비닐 주머니에 갇혀있습니다. 손으로 쓰다듬습니다. 습기가 배어 나올 듯합니다. 손에 차가운 느낌이 다가옵니다.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TV문학관을 통해 본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주인공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이어 알퐁스 도데의 「별」 속의 소나기가 머릿속을 채웠습니다. 이 겨울에 웬 여름의 소나기가 찾아왔을까. 글의 내용이나 장소는 다르지만, 아가씨와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 글이 좋아 몇 차례나 읽었고 나이 듦을 잊은 채 작년에도 읽었습니다. 순정이란 게 나이와 관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몸을 늙었지만, 마음은 때에 따라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소년이고 젊은이입니다. 못다 한 사랑일까요. 아니면 사랑다운 첫사랑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때입니다. 「소나기」의 장면처럼 여름이면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입니다. 산길에서 소나기를 만나면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음에도 책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달립니다. 피할 곳이라고는 큰 나무 밑이나 바위 밑입니다. 이도 여의찮을 때는 뛰기는 했는데 보람도 없이 온몸이 소나기를 뒤집어썼습니다.


어느 날 가을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달렸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밭에 갈무리하기 위해 단을 만들어 세워둔 수숫대의 묶음 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묶음 사이로 몸을 피했습니다. 머리를 타고 흐르던 빗물이 멈췄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몸이 차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 몸이 떨립니다. 더 깊이 묶음 사이를 파고들었습니다. 팔짱을 낀 채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개울 물소리가 들립니다. 소나기가 얼마나 퍼부었는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흐르는 물이 졸졸 노래를 부릅니다. 어둠이 다가오면서 소나기는 가는 줄기로 변했습니다. 수숫대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고 손을 한 번 내밀었습니다. 깜깜해지기 전에 가야 합니다.


나에게는 소나기와 관련된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위의 책을 읽을 때마다 잊지 않는 게 있습니다. 나에게도 아가씨와 같은 사람과의 인연이 있고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도 좋습니다. 짝사랑이라도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날은 어떨까요. 더 낭만적이지 않을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그립니다.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립니다. 옷이 젖어듭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소년으로 젊은이로 내 모습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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