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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타이밍

놓쳐버린 순간들의 아쉬움에 대하여

by 낭낭

놓쳐버린 순간들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가 있다.

왜 그렇게 했을까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는 시간들. 사람들이 적으면 쉬이 할 수 있는 또는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하기 어려워진다. 입이 벌어지고 이야기를 건네거나 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순간들. 선뜻 먼저 무언가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들. 왜 그럴까 돌이켜 봤을 때 이것이 순전히 나의 문제인지, 아니 문제가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 건 아닐까.


요즘 들어 가장 후회가 많이 드는 순간들은 개인적으로 대중교통에서 일어나는 거 같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대중교통에서 가장 머리에 아른거리고 후회하는 순간들이 생기다니 웃기다. 그게 무슨 그리 큰 잘못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가슴속에 콕 박혀서 계속 신경이 쓰인다. 특히 사람이 많은 만원 버스일 경우 더 그렇다. 지하철은 좀 답답해서 버스를 자주 이용하곤 하는데 한정된 공간에서 갖가지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엉켜 있다 보면 정말 많은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웃에게 나의 선행을 알리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기독교적 가르침이 너무 몸에 익어서인지 사람이 적은 버스에서는 선행을 베풀기 쉬운데 사람이 많을 때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선행을 베풀지 않는 스스로가, 입을 떼기조차 어려워하는 스스로가 우습고 이상하고 못나게 느껴진다.


버스를 탔는데 노약좌석에 앉았다. 자랑스럽진 않지만 먼 곳을 다녀온 길이라 짐도 많았고 피로도 가득해 앉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별로 없는 버스였고 앉을 자리는 아직 충분히 많으니 다른 사람에게 이 자리를 넘길 바에는 앉아있다가 필요한 사람(또는 그렇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일어설 마음이었다. 그렇게 버스는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하차문이 열렸다. 버스가 살짝 낮아지는 느낌이 들어보니 휠체어 하나가 버스 위에 올라탔다.


처음으로 휠체어가 버스에 오른 것을 봤다. 아니다 본 적은 있는데 그때는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버스기사도 내려서 도와줘서 꽤나 능숙하게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휠체어를 탄 분은 혼자였고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도 휠체어가 들어가는 노약좌석을 접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눌러도 안 눌리고 접으려도 안 접히는 좌석과 씨름하다가 아무도 관심 없고 힘은 겨워 그만두었다. 버스 안에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나는 자리를 내줬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리는 비었고 휠체어는 애매하게 가운데에 있었으며 사람들은 서로 겹쳐져 구겨졌다.


그때 한 젊은 여자가 어깨를 툭툭 쳐서 잠시 나와 달라고 했다. 이 분은 뭐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려온 여성은 익숙하듯이 좌석을 접었다. 의자가 접히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앞에 있는 좌석을 하나 더 힘을 합쳐 접는다. 처음 접는다고 서투르다고 쑥스러워하는 분도 계셨다. 한 여성이 한 행동 하나가 마침내 혼란스러운 버스 안에 질서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바로 내렸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한다. 조금만 더 힘을 주고 밀거나 당길걸 왜 그러지 못했을까. 왜 그냥 서서 바보같이 구겨진 채로 서 있었을까. 그러나 지나간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또 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여기 앉으실래요 말하지 못했다.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나서지 않음을 미덕이라고 치부하는 사회에서 타이밍 잡기란 참 어렵다. 눈치를 보기 때문에 참 어렵다. 이 시선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야지 내가 필요한 순간들을 잘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낙하산을 펼치는 가장 적합한 순간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가 아니라 나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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