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
아주 오래전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누나가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평소 완전 낙천적인 성격의 누나가 우는 걸 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누나와 같은 반의 어느 형이 누나를 계속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누나는 낙천적인 성격이라 참다 참다 그날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 같았습니다. 저녁에 어머니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습니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 이셨는데, 어린 제가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느낌은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 셨지만, 뭔가 바깥에서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누나가 괴롭힘을 당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이미 오래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다음날 바로 그 형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았기에 그 형이 큰일 났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그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그 형은 정말 너무나 행복한 표정이었고, 누나에게 사실 누나를 좋아해서 괴롭혔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인데, 그 형의 집으로 찾아간 아버지는, 그 형이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고 있는 상황을 보고는 그 형을 데리고 시장으로 가서 새 옷도 사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같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꽤 친하게 지냈던 동갑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축구를 했었는데, 같은 또래인 우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몸도 웬만한 어른처럼 우람했었습니다. 이 친구는 부모님이 안 계셨고 동생과 둘이 살았는데, 가끔씩 친척 어른들이 오셔서 살펴보고 가는 정도였습니다.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축구를 했었고, 결국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올라갔고, 유명한 프로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코치도 했었습니다. 축구 선수로는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한 번은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 없이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서 축구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 두 분에게 가장 큰 도움을 받았는데 한분은 축구부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해 주셨던 교감선생님과 또 한분은 위기 때마다 도움을 주셨던 우리 아버지라고 했었습니다. 자기는 축구하면서 새 축구화도 아버지가 사주셔서 처음 신어봤고, 돈 들어가는 일이 생길 때마다 아버지가 오셔서 그 돈을 해결해주고 가셔서 너무나 고마웠다고 얘기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축구부였던 이 친구가 항상 나를 위해주었던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걸 그날 알았습니다.
지난 토요일 아버지의 80번째 생신이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몸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거동도 불편하고 생각도 맑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족에게는 항상 웃는 얼굴로 긍정적인 말씀만 하십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40십대 중반에 낳은 늦둥이셨고, 할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나이 많은 할머니 아래서 자라셨습니다. 워낙 늦둥이라 저는 큰아버지와 외할어버지 나이가 같을 정도였습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 같은 막내 동생이 아버지인데, 워낙 어려운 상황일 때라 동생보다는 자식을 먼저 신경 쓸 수밖에 없어서 항상 동생인 아버지에게 미안했었다. 다행히 동생이 공부를 잘해서 대한민국 최고 대학에도 가고 기특해서 너무 좋았는데, 그래도 너무 미안했고 마음이 아팠다. 차마 너희 아버지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과분하게도 아버지에게서 참 많은 것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는 머리도 받았고, 성실해야 되는 태도도 받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되는 마음도 받았지만, 제가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자신감입니다.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따뜻한 마음도 필요하고 또 배려할 능력도 있어야 되는데, 그런 능력은 자신감이 기본이다. 아버지가 항상 하신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일은 능력보다 자신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사람의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 자신감의 차이일 뿐. 아버지가 늘 강조하셨던 얘기입니다.
증시가 오랫동안 하락하면서 대부분의 개인투자자들은 마음이 위축되어 있습니다. 지난 7월 이후 외국인은 코스피시장에서 10조 원이 넘는 매수를 하면서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쓸어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개인은 5조 원을 매도하면서 지금 시장에서 빠져나가기에 급급합니다. 이것은 물론 개인의 잘못만이 아닙니다. 위기를 조장하고 부풀리는 언론이나 전문가의 책임도 있습니다. 저는 26년간 주식시장에 있으면서 항상 이런 구도가 반복되는 게 너무나 싫습니다. 지금은 베어마켓 랠리인가 아닌가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상승에는 동참하고 맹백한 하락에는 리스크를 관리하면 됩니다. 지금 우리 개인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못 먹어도 고"를 외칠 수 있는 자신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