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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Jun 27. 2023

구로동에도 별이 있을까

민호형의 연애편지



뜻밖의 휴가


큰누나와 복순이 누나가 일하는 봉제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5일간 휴가를 얻어 막차를 타고 내려왔다.

누나가 사준 딱총에 화약을 넣고 탕탕 총싸움을 하고 있는데 민호 형이 불렀다,

민호 형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째 광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노임 주는 날 광부들의 목숨 값 일원이라도 금액 차이가 나면, 언제나 광부들 편에서 빠르게 주판으로 해결해 주곤 했다.

나이는 큰누나보다 서너 살 위였다.

"큰누나에게 이것 좀 전해줄래. 어른들 모르게."

딱지처럼 접은 편지를 손에 쥐여주며 부탁을 했다.

"이게 뭔데요?"

"누나 갖다 주면 알아. 그리고 이건 과자 사 먹어."

이십 원을 주면서 등을 밀었다.

쫀드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읽지 말라는 편지를 읽었다.



민호 형은 나의 적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습니다. 지난 설날 오셨을 때 뵙고 싶었지만, 이제야 용기를 내어 봅니다. 내일 저녁 8시 빠리 양복점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라도 못 나오시면 동생 편에 공장 주소라도 알려주시면 편지드리겠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큰누나를 민호 형이 꼬시고 있었다. 발랑 까진 복순이 누나나 넘볼 것이지. 편지를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심부름값 이십 원으로 군것질을 했기 때문에 누나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누나! 민호 형 알아?"

"사무실에 있는 형이잖아. 근데 왜?"

엄마가 볼까 봐 누나를 끌고 옥수수밭으로 갔다.

"민호가 이거 전해주래."

"민호가 뭐야. 형이라고 해야지."

편지를 읽는 누나 얼굴이 사르비보다 더 빨개졌다.

"누나, 민호한테 시집갈 거야.?"

울음이 터지는 걸 억지로 참고 물어봤다.

내일이라도 시집갈 것만 같았다.

"시집은 무슨,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시집갈게.

 편지 읽어봤지?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내일 이 자식 만날 거야?"

"안 만나. 너 자꾸 민호 형 욕하면 누나 화낸다."

누나가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그날 밤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큰누나를 꼭 끌어안고 잤다. 큰누나에게서 춘천옥 아줌마의 향긋한 분냄새가 났다.



큰누나 지키기


다음날 큰누나가 민호 형을 만날까 봐 친구들이 말뚝박기 하자는 것도 못하고, 누나 옆에서 하지도 않던 방학 숙제를 했다. 저녁 8시까지만 누나를 지키면 된다.

누나가 사택 공중변소 갈 때도 졸졸 따라가서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

"너 지금 누나 감시하는 거지?"

누나는 배를 잡고 웃었지만 나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엄마! 나 복순이 좀 보고 올게."

저녁 7시 30분 큰누나가 나가려고 한다.

큰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누나가 깔깔깔 웃으며

"너도 같이 가자. 어두워지면 네가 누나 지켜줘야지."

안 그래도 따라갈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여름이지만 서늘한 바람이 불고, 때 이른 귀뚜라미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누나가 지금 민호 형 만나러 갈 건데, 너 불안해하고 누나 찾을까 봐 데려가는 거야. 민호 형 보면 인사 잘해 알았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어제 편지 읽는 누나의 볼이 빨개진 건, 민호 형한테 시집가고 싶어서 그랬을 거다.


누나는 넓은 신작로를 놔두고 사람들이 안 다니는 밭둑을 지나, 무령 극장 뒤 호젓한 뒷골목으로 갔다.

시장 입구 빠리 양복점 나무간판 옆, 어두운 골목에서 민호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로 멋을 내고 나온 듯 머리엔 포마드 기름을 발랐고, 청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누나를 보자 허리를 숙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못 나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너도 같이 왔구나."

나와는 피차 웃으며 인사할 처지는 아니었다.

민호 형 입장에선 덜 익은 대추만 한 자식을 발로 뻥 차버리고 싶을 것이고, 나는 민호 형의 다리라도 물어뜯고 싶었다.

"민호 형이랑 얘기 좀 할게. 십 분만 저리 가서 아는 사람 오나 망 좀 봐줄래."

누나가 보초를 서라고 한다.

나는 엄마 말은 죽어라 안 들어서 호랭이가

물어갈 놈이란 욕을 매일 듣지만, 큰누나와 아버지 말은 잘 들었다.


가지고 나온 새총에 짱돌 하나를 장전하고

빠리 양복점 처마 밑에서 얘기하는 두 사람만 지켜봤다.

혹시라도 민호 형이 누나 손이라도 잡으면 가차 없이 쏴버릴 것이다.

십분, 긴 시간이 흘렀다.

"누나 집에 안 가?"

누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편지드리고 시간 되면 서울로 찾아뵙겠습니다.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너도 잘 가."

민호 형이 또 한 번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누나가 내 머리를 누르는 바람에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말았다.

"안녕히 세요."



별을 못 찾는 누나


신작로 넓은 길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흰 쌀알 같은 은하수가 누나와 나의 눈 속에서 흘러 다녔고,

별똥별 하나가 긴 꼬리를 흔들며 무령폭포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누나 북극성 찾아봐. 구로동에도 북극성 있어?"

누나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북극성이 어디 있더라. 서울에선 별이 안 보여. 별이 있어도 일하느라 볼 시간도 없고."

"누나 몇 시까지 일해?"

"아침 여덟 시부터 밤 열 시까지 하는데, 가끔은 철야작업도 해. 그래도 복순이랑 기숙사 같은 방에 있어서 다행이지."

여름 밤하늘에 큰 곰자리까지 찾아주던 큰누나가 찾기 쉬운 북극성도 찾지 못한다니 슬퍼졌다.

가을밤에도 누나의 무릎에 누워 하늘을 보면 단번에 페가수스 별자리를 찾아주던 큰누나가 밤하늘 올려다볼 시간도 없이 일을 한다고 했다.

차라리, 누나가 민호 형에게 시집가서 별이나 실컷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미안해 누나."

"뭐가 미안해?"

"민호 형한테 시집 못 가게 해서."

누나가 꼭 안아주자 땡벌에 쏘인 것처럼 코끝따가웠다. 우는 거 안 들키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하수 사이로 자꾸만 떨어지는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었다.

큰누나  철야작업 없게 해 주고, 다시 별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날밤 스케치북을 찢어 왕자 크레파스로 밤하늘을 그리고, 별자리도 표시해서 누나의 커다란 가방에 넣어놓았다.


큰누나가 서울 공장으로 가는 날이다.

이른 아침 복순이 누나와, 큰누나가 첫차를 타려고 종점에 있었다.

멀리서 민호 형이 눈인사를 했다.

버스에서 누나가 손을 흔들었다.

엄마와 나에게 인사를 한 것인지, 민호 형에게 인사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빨리 커서 큰누나 호강시켜 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미루나무 언덕을 지나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엄마는 훌쩍거렸다.


텅 빈 종점에서, 키 큰 미루나무만 멍하니 바라보는 키 큰 민호형도 불쌍했다.

머뭇거리다 민호형에게 달려가 아껴놨던 이브 껌 하나를 수줍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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