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로선 Jan 03. 2024

폭설

길 없는 길


겨울엔  모두가 떠나서 길을 잃는다,
가슴속에서 미생물처럼 꼬무락거리던 한 줄의 時도 결빙되는 겨울의 옥탑방.
문밖에는 언제나 한 많은 검객의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옥상의 눈을 쓸어 한 곳으로 모으고 있다.

한심한 겨울, 주제넘게 예술가인척 꼴값만 떨다가 봄이 올 때까지는 남아 있겠다던 애인도 등을 돌리는 엄동설한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새벽 외출


연탄난로도 얼어 죽은 새벽 배낭을 챙긴다.
이제는 스님이 돼버린 김선배 목숨처럼 지키고 있는 작은 암자, 세상이 끝내 외면하거든 찾아오라던 눈 속의 오두막 절집, 나는 오늘 그곳으로 가겠다. 아궁이에 불 때서 부처님 밥이나 짓고, 가끔은 바위동굴 찾아 겨울잠 자고 있는 곰의 등에 기대어 따듯한 체온을 느끼고 싶다. 그러다 서러워지면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새벽이 올 때까지 숨죽여 울면 그만이다.

비루한 화실 문짝에 다음 달 달력을 찢어 '가출 중' 세 음절을 써서 붙였다. 불면의 밤이면 찾아오는 열등감도 정이 들었는지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데리고 간다.



  쌓인 터미널

통일호 열차는 새마을과 무궁화 열차에 길을 내주느라 간이역에서 한참을 정차하는데, 소외된  승객들 누구도 지루하다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원주서부터 시작된 눈발은 종착역에 내리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어져 있다. 터미널 버스도 발이 묶여 운행을 중단한 채 눈이 그치길 기다린다.

역전 골목 국밥집구석에 앉아 술을 마신다.
적당히 달구어진 연탄난로 에서는 양미리가 구워지고, 거나하게 취한 단골 술꾼이 식당 여주인의 엉덩이를 치며 희롱을 한다. 인심 좋게 생긴 여주인도 싫지 않은 듯 콧소리를 내며 눈을 흘긴다. 국밥이 식고 소주 한 병을 마실 때까지 눈은 꾸준히 내린다. 라디오에선 연신 영동 지방의 눈 소식을 불안하게 알려준다.
걸어가야겠다. 어둡고 눈 쌓인 신작로 한 시간,

산길 세 시간을 걸을 수 있을까, 국밥집 여주인이 혀를 찬다. 술꾼도 거든다. 어차피 버스는 내일도 운행을 못할 것이고 부지런히 걸어도 반나절은 족히 걸리니,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라 그렁거리던 가래를 재떨이에 뱉어냈다.



달빛 산행


보름인지 겨울 달이 밝다.
국밥집에서 얻어온 까만 비닐봉지를 잘라 허벅지까지 감싸고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낸다.
무릎까지 감기는 눈은 가지 말라 만류하는데 어느새 신작로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길이 없다. 다행히 길을 잃을만하면 세워놓은 솟대와 철 지난 연등이 보인다.
아마도 암자까지 수십 개의 솟대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겨울 암자를 찾아오는 중생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피일까 고맙기도 하다.

시간을 쉬지 않고 걷는다. 쌓인 눈으로 한걸음 옮기는 것이 속을 걷는 것처럼 힘들고 더디다. 흘린 땀이 식어 머리에 고드름이 생긴다. 이 고개 넘어 큰 소나무를 지나면 암자가 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첩첩산중 험한 산골에서 고행을 해야 해탈을 하는 것일까. 물려받은 재산으로 평생을 돈이나 세면서 살 줄 알았던 김선배가 무슨 생각으로 무소유의 길을 가고 있는지, 이번에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겠지만 문득 슬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푸드덕 멀리서 솟대 위의 새가 날아간다.

나무로 만든 새가 달빛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겨울나무


눈보라에 야윈 나무들이 몸서리치며 휘파람을 불고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람 속의 소나무에서는 파도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파도가 뒤척일 때마다 솟대도, 찢어진 연등도, 반짝이는 눈의 입자까지 깊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파도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운 좋게 지금 죽으면 한겨울 굶주린 산짐승의 먹이라도 될는지 잠시 부질없는 생각.


마지막 솟대를 지나 당도한 암자.
향내음과 가끔 들리는 풍경소리가 정겹다.

삼라만상은 잠들어 있는데 아직도 잠들지 않은 부처님 하나가 촛불에 일렁이는 창호지 문에 그림자로 남아있다.


마당의 눈이 말끔히 치워진 걸 보니

혹시 나를 기다리셨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학사주점 뜨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