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이 찰랑거리며 얼굴에 닿았다. 눈을 뜬 수아가 주변을 살펴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변이 온통 물과 억새로 뒤덮인 습지였기 때문이다. 낮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밤도 아닌, 백야처럼 빛이 그늘져 있었고, 억새 위로 보이는 하늘에는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었다.
수아는 홀린 듯이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는지, 수아가 물속에 잠긴 자신의 발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적막을 깨뜨리는 인기척.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작은 아이를 끌고 가는 게 보였다. 얼굴에 새 가면을 쓴 아이는 여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제풀에 넘어졌다. 여자는 그런 아이에게 아랑곳하지 않았고, 끌다시피 아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이가 바닥에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여자는 매정하게도 잡고 있던 아이 손을 떨구고, 미련 없이 억새 속으로 사라져 갔다.
수아가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아이는 마네킹처럼 몸이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동정이었을까? 갑작스러운 감정에 몸이 먼저 반응한 수아가 아이를 안기 위해 두 손을 뻗었지만, 아이는 수아의 손을 차갑게 밀쳐냈다. 놀란 수아의 시선이, 가면 속 아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헉!"
잠에서 깬 수아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진정해, 괜찮아?"
"네, 괜찮아요. 좀 놀랜 것뿐이에요."
수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수아 옆으로 다가온 서하가 말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얼굴에 새 가면을 쓴 아이가 있었는데, 습지에서 엄마로 보이는 여자에게 끌려가고 있었어요. 그 상황을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아이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그러다 가면 속 아이와 눈이 마주쳤어요."
"가면을 쓴 아이가 정 기철인가?"
"잘 모르겠어요."
"당분간 꿈속 인물들과는 접촉하지 말고,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기철의 꿈은 그가 만든 세상이야. 이질적 존재에 대한 배타심이 강할 수 있어. 현실보다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엔딩사인으로 꿈에서 나오는 거 잊지 말고."
"그런데, 이번에는 엔딩 없이 꿈에서 나왔어요."
"너무 놀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꿈주가 밀어냈을 확률이 높아."
"......"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다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괜찮겠어?"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숙면하기 좋은 시설이 되어 있었지만, 수아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서 뒤척이는 수아를 본 서하가 수면 유도제를 준비했으나, 그 사이 수아가 잠들어 있었다.
차도 사람도 없는 황량한 아스팔트 위에 수아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흐려 있었고, 발 밑으로 노란색 줄무늬가 끝없이 뻗어 있었다. 막막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수아는 기철을 찾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교감도 느껴지질 않았다. 수아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약하게 들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소리가 들린다]
나지막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느껴졌다.
수아는 자력에 끌리 듯, 소리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 안에서 한 남자가 소리 지르는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을 움츠린 아이는 남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자가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손바닥으로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두 손으로 빌었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 남자가 기철인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창고 안을 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아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확인했으나, 남자도 아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수아 머리에 누군가 자루 같은 걸 씌웠다. 깜짝 놀란 수아가 벗겨내려 했지만,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녀는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옷장에 갇혀 버린 아이처럼 어둠의 공포가 극에 달할 때, 수아가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엔딩사인을 했다.
"오메가"
타인의 무의식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었던 수아는 원하는 시점에 자신을 각성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엔딩사인을 만들었다. '오메가'는 헬라어 24번째 마지막 글자로 끝을 의미한다.
0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