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
가로수 옆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검은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보잘것없는 양심 덩어리라고 여기고 무시해도 좋으련만, 강 유조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여유가 있었는지 버려진 검은 봉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은박지는 뭐야! 걸래도 있네. 아휴, 락스냄새. 누가 이런 걸 길거리에 버려."
봉지를 향해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는 검은 봉지를 손에 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왜? 뭐 놓고 갔어?"
"누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렸더라고"
"야! 그렇다고 그걸 가져오면 어떡해."
"아니,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버리려고 그러지. 쓰레기 봉지 어디 있어?"
"저기 구석에. 줘봐, 엄마가 할게. 우리 쓰레기 하고 같이 버리면 되겠네. 누가 경찰 아니랄까 봐 유별나긴..."
"내가 버릴게 줘요."
"수거하는 요일이 따로 있어. 아! 오늘이구나. 그럼, 이따 오후에 내놓으면 돼.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출근해."
"네, 갔다 올게요."
유조가 문을 나서는데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현장으로 오라는 팀장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새벽녘, 쓰레기를 수거하던 환경공무원이 이상한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종량제 봉투가 아니라서 옆에 던져두었는데, 안에 있던 내용물이 봉지를 비집고 나왔다. 그걸 본 환경공무원이 너무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봉지에 깨진 유리가 들어있어 손을 베이거나, 성인돌을 사람으로 오인해 놀라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토막 난 사람 손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요동치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촉각으로 다시 확인한 환경공무원은 112에 관련 내용을 신고 했다.
강 유조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감식팀이 현장에서 증거물 수집 중이었고, 토막 사채를 봉지채 밀봉하여 냉장박스에 넣고 있었다. 상황을 알 수 없었던 그는, 현장에 있던 선배에게 넌지시 내용을 묻다가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팀장이 둘을 향해 손짓했다.
"하형사는 저기 보이는 CCTV 어디서 관리하는지 알아보고, 사채든 검은 봉지 버리고 간 사람 찍혔는지 확인해 봐. 시간 없으니까 서둘러."
"네"
"강형사는 여기 감식팀 따라가서 피해자 신원 나오는 대로 확인해서 서로 들어와"
지문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35세 여성, 이름은 장 미소였다. 둔촌동 소재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직업은 백화점 세일즈팀 구매담당 직원이었다. 3년 전 합의 이혼했고, 전 남편은 8개월 전 사업차 베트남으로 출국한 기록이 있었다.
"CCTV에 찍혔어?"
회의실에 들어오는 하형사를 향해 팀장이 말했다.
"네, 지금 스크린에 띄우겠습니다. 강형사 불 좀 꺼줘."
영상 속 용의자가 모자를 눌러쓴 상태라서 얼굴 식별이 어려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용의자가 자전거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 쓰레기 틈에 내려놓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움직임이 여자 같은데? 저 걸음걸이 봐."
"용의자의 동선을 따라 추적해 봤더니, 처음 봉지를 버린 장소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또 하나를 버렸습니다."
"저 봉지는 어떻게 됐어?"
"쓰레기 수거 차량이 지나간 상태라서 그대로 있었는데, 약 3시간 뒤에 어떤 남자가 가져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영상은 메일로 받았는데..."
"저걸 뭐 하려고 가져갔을까? 일만 복잡해지게 생겼네."
회의실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강형사 같습니다."
"강형사?"
강형사는 스크린 속에 나온 인물이 자신이라는 소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쭉 내민 채 실눈으로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강형사, 저 검은 봉지 왜 가져갔어? 봉지 어디 있어?"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게... 좀 이상해 보여서 집에 두고 왔습니다."
"뭐, 집에?, 야! 누가 보면 범인 도와주는 거 같잖아. 지금 빨리 가져와!"
강형사는 그 봉지가 살인사건과 관계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명색이 경찰인데, 살인자가 두고 간 증거물을 버리려 했다니,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화가 났다.
"엄마!"
"깜짝이야. 왜, 또 왔어?"
"그거 어디 있어."
"뭐? 휴지?"
"아니, 아침에 그 검은 비닐봉지 말이야!"
"그거 버렸지. 버린다고 했잖아"
"뭐라고!"
그는 순간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디에 버렸어."
"쓰레기 수거해 가는데 놔뒀지"
그는 정신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집 앞에는 야무지게 매듭 된 여러 개의 종량제 봉지가 놓여 있었고,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그는 무작정 종량제 봉지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여기 이거잖아."
토막 사체 부검결과 혈액에서 프로포폴 성분이 소량 검출되었다. 직접적인 사망의 원인은 아니었지만, 뭔가 연관성이 있어 보였다. 사체의 절단면이 매우 거칠었는데, 날이 무딘 칼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단단한 부위는 톱을 사용했다. 근육 경직 상태로만 볼 때, 사망 시점으로부터 약 38시간 정도 경과됐을 거라는 게 부검의 소견이었다.
강 유조가 가져온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락스 냄새가 나는 빨간색 수건과 종이컵, 비닐포장된 의료용 튜빙호수, 일회용 은박접시가 구겨진 채 들어 있었고, 그 구겨진 은박접시 안에는 빈 프로포폴 병이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던 건지, 병에서 지문이 나왔다. 지문은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기에, 수사팀은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분위기였고, 강형사는 팀장에게 칭찬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지문조회에서 밝혀진 용의자는 34세의 여성 여 미란이었다. 여 미란의 직업은 간호사였고, 전과 기록뿐 아니라, 그 흔한 교통위반 딱지 하나가 없었지만, 거주지가 장 미소와 같은 아파트 단지라는 것과 그녀의 지인이라는 점이, 의심을 사고 있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카페의 지인들 말에 따르면, 처음에 둘 사이가 부러울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장 미소가 돈 때문에 고민하는 여 미란을 도와줬는데, 여 미란이 며칠 지나지 않아 나이스하게 돈을 상환하며 선물까지 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자신도 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후로도 그들 사이에 소소하게 돈거래가 있었고,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가, 여 미란이 큰돈을 빌려간 게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여 미란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상환 일을 자꾸 미뤘고, 둘 사이가 급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찰은 살인 및 사체 유기혐의로 여 미란을 긴급체포 하기에 이르고, 수사 초기에 단서를 찾아낸 강 유조형사에게 피의자 심문을 맡겨 사건경위를 파악하게 했다.
갑작스럽게 연행되었지만, 여 미란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고, 의자에 곧게 앉아 있었는데, 오히려 심문을 해야 하는 강 유조가 더 긴장하는 듯 보였다. 취조실 문이 열리자 여미란이 고개를 들었다.
여 미란 맞은편에 자리한 강 유조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강 유조 형사입니다. 장 미소씨 살해 및 시체유기 관련하여 다수의 증거들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여 미란 씨와 관련 있습니다. 지금부터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할 예정인데, 거짓 없이 사실만을 진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7일 새벽 5시경 자택에서 나온 여 미란 씨가 검은색 비닐봉지를 도로가에 버렸는데 맞습니까?"
"네, 제 차 앞에 있었던 봉지였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누군가 제 차 앞에 버려둔 봉지였는데, 운동하러 가는 길에 차 안에 있던 쓰레기와 함께 버렸어요."
"그 시간에 자전거를 타러 나왔다고요?"
"네, 자전거는 비 오거나, 눈 오는 경우를 빼곤 매일 타고 있어요."
"자전거를 타러 나와서 모르는 쓰레기를 가지고 갔다?"
강 유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날은 집에 종량제 봉투가 떨어져서 사야 했거든요. 편의점까지 가지고 가려했는데, 불편하고 무거워서 도중에 버리게 됐습니다."
"네, 뭐 좋습니다. 근데, 내용물은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쓰레기가 들어 있을 것 같아서, 확인하지 않은 상태로 버렸어요."
"장 미소씨 아시죠?"
"네,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입니다."
"친구는 아닌가 보죠?"
"친구... 맞아요."
"최근에 두 분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여 미란은 장 미소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고, 당근 거래를 하다가 처음 알게 되었는데, 돌싱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서로 의지하며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왕래가 잦아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돈거래도 하게 되었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조금 큰 액수의 돈을 빌린 게 본의 아니게 문제가 생겼고, 투자한 돈을 회수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된 미소가 너그럽게 상환일을 연기해 줬다고 한다. 사람들 말처럼 말다툼을 벌이거나 싸운 적은 없었다고 했다.
"돈을 안 갚으려고 장 미소씨를 죽였습니까?"
강 유조가 여 미란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소는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갚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친해도 돈관계는 깨끗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서둘러 갚을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절대로 미소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여 미란이 처음부터 돈이 목적으로 장 미소에게 접근했을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은 4년 전 발생한 그녀의 남편 사망사건 때문인데, 119 안전신고센터의 기록을 보면,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다급한 구조요청 전화가 있었고, 구급대원들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남편이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육안으로 식별하기에도 얼굴에 생기가 전혀 없었고, 체온이 너무 낮아 손 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시신부검에서도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고, 돌연사망사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보험사에서는 고의적 사망이 의심된다는 사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고, 여 미란이 법률 대리인을 고용해 보험금 청구 소송을 진행. 결과적으로 승소하여 보험금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남편 보험금의 수익자로 지정되어 있던 그녀가 보험사로부터 받은 금액은 18억 원과 경과이자, 소송비용 포함 총 19억 8천만 원이었다.
장 미소의 빚독촉이 심해지자 여 미란은 그녀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치밀하게 계획했을 거라는 게 경찰의 생각이었다. 여 미란은 당장 돈을 갚을 것처럼 장 미소를 자신의 집으로 꾀어, 프로포폴을 이용해 의식을 잃게 한 뒤, 죽였을 것이다. 여 미란이 마트에서 세척도구를 구매하는 CCTV 영상과 장 미소가 사망 당일에 여 미란 아파트로 들어가는 CCTV 영상, 프로포폴 병에 찍힌 지문, 길거리에 유기한 사체가 이를 뒤받침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 미소가 실종되기 며칠 전, 여 미란 씨 집에 간 사실이 있는데, 들어갔으나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없고, CCTV에도 찍히지 않았는데, 장 미소 씨 어디 간 겁니까? 집에서 죽였습니까?"
"아니요! 죽이지 않았어요. 미소가 집에 왔던 건 사실이지만, 제가 부른 게 아니에요. 빌린 돈 때문에 왔었고,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갚으라고 말해줬어요. 돌아간 걸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를 제가 책임져야 하나요? CCTV에 찍힌 게 없다면 아파트 관리자에게 물어야지, 제게 물으시면 답해 드릴 게 없습니다."
"그날 낮에 마트에서 세척도구를 구매한 이유는 뭡니까?"
"집안 청소도구를 구매하는데 몰라서 물으시나요?"
"좋습니다. 여 미란 씨가 버린 사체에서 프로포폴 성분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버린 봉지에선 프로포폴 병이 나왔고, 그 병에 여 미란 씨 지문이 있었습니다. 이래도 인정 안 하실 건가요?"
여 미란은 답변을 하지 못했다. 강 유조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여 미란 씨!"
"제 잘못입니다... 남편과 사별 후, 저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려왔습니다. 프로포폴 처방으로 그나마 견딜 수 있었죠. 장 미소도 나와 같은 증상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근무하면서 환자에게 투약 후, 남는 프로포폴을 따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남게 되면, 기록해야 했지만, 미소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러지 못했습니다. 프로포롤 성분이 검출되었다면,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겁니다. 프로포폴 투약한 것이 문제라면, 그에 따른 벌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미소를 죽였다는 누명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경찰이 여 미란의 가택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 어디에서도 혈액 반응은 나오지 않았고, 사체 훼손 도구뿐 아니라, 작은 단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잡은 줄만 알았던 물고기가 그물 안에 없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0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