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세상을 떠나 낯선 길 위에 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by 아마토

지금까지 우리는 창조 서사의 아담과 하와, 인류 최초의 갈등을 상징하는 카인과 아벨, 그리고 대홍수와 새로운 시작을 알린 노아와 바벨탑의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이들 모두 구약성서의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인물들이죠.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할 '아브라함'은 그 무게감이 조금 다릅니다. 이제부턴 종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아브라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름부터가 '아버지'입니다. 본래 이름인 '아브람(Abram)'은 '높여진 아버지'를, 후에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아브라함(Abraham)'은 '많은 이들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그의 이름은 그대로 그의 삶이 되었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 모두 자신들의 뿌리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이 세 종교는 각각의 경전을 통해 아브라함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교는 구약성서(타나크)와 탈무드를, 그리스도교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삼습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토라(모세오경), 시편(자부르), 예수의 복음서(Injil)를 인정하며, 최종 계시로서 무함마드를 통해 기록된 쿠란을 경전의 완성으로 여깁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신학적 체계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근원으로서 공통적으로 존중받는 인물이며, 이는 그의 신앙사적 중요성을 명백히 증명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생애를 비평적 독서(Lectio critica) 관점과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통해 살펴보죠.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칼데아 우르'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역사적으로 '칼데아'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신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칼데아'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기원전 22세기)보다 훨씬 나중에 쓰인 표현이거든요. 마치 조선시대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서울 강남구"라고 말하는 것처럼 조금 어색한 부분이죠. 아마도 이 이야기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기록되면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익숙한 지명을 사용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즉,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후대, 특히 바빌론 유배기(기원전 6세기) 이후에 최종적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아브라함의 집안 배경입니다. 그의 아버지 '테라'는 가족을 이끌고 '하란'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데, 이곳은 당시 달의 신을 섬기는 걸로 아주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여호수아 24:2)에서도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분명히 말해줍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태신앙'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겼고, 아브라함은 자기 세대에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첫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이 말씀은 단순히 이사를 가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너를 붙들고 있던 낡은 세계, 익숙한 믿음을 모두 버리고 오직 나만 믿고 새로운 길을 떠나라는 '결단'의 초대였죠.


스크린샷 2025-09-05 145145.png 피터 라스트만의 <가나안으로 가는 길의 아브라함>, 1614년작


아브라함의 소명은 오늘날 우리에게 심오한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느님의 불확실한 약속 하나에 의지하여 미지의 길을 떠날 용기가 있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검증된 길, 예측 가능한 삶의 궤적을 선호합니다.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 것은 본질적으로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삶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순간에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을 통해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병에 걸려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절망이었지만,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병이 나았을 때, 저는 비로소 신앙을 제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이러한 영적 체험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관념적 의심을 실존적 확신으로 바꾸는 힘을 지닙니다. 물론, 신앙 체험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구체적인 체험 없이 성경을 학문적으로만 이해하려 하면 믿음으로 나아가기 어렵고 반대로 이성적 탐구 없이 신비적 체험에만 의존하면 신앙은 맹목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깊이 있는 신앙은 영적인 체험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적 이해가 함께할 때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의 특별했던 그 체험은 젊은 날의 아픔 속에서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가, 신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설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요.


여러분도 각자의 삶에서 이런 특별한 만남, 영적인 체험을 하시길 바라봅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이 주시는 큰 은총일 테니까요. 물론 그 여정이 아브라함처럼 고되거나, 저처럼 병고를 통과하는 길이 아니기를, 평안 속에서 주어지는 선물이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건강한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일 테니까요. 역시 건강이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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