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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그늘 Oct 05. 2023

은행나무와 돼지갈비찜

음식여행

집 근처 대로변 은행나무에서 은행 열매를 수거하는 구청 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긴 막대로 은행나무를 툭툭 치자 노랗게 익은 은행들이 우수수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나무 밑에서는 다른 사람이 은행나무 열매를 부대 자루에 쓸어 담고 있었다. 혹여 은행알을 밟을까 싶어 조심하면서 그곳을 지났다.


은행나무가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열매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사람들은 여러 번 세척 후 냄새를 제거하고 먹는다. 씨앗에는 진해 거담의 효과가 있고 잎에는 징코라이드라는 성분이 있어 혈액순환에 도움을 준다. 미량의 청산배당체를 함유하고 있어 많이 먹으면 해롭지만, 적당히 성인 10알 미만으로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잔존하는 활 화석 가운데 하나이며 중생대의 화석식물이다. 수만 년 지구상에 살아남아 지구의 변화를 봐 온 신비의 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는 영월 하송리 있는 나무가 천이백 살이다. 양평 용문사에도 천백 살 되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1907년 정미의병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지만 은행나무는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냉동실에서 얼린 노란 은행알을 한 뭉치 꺼내 주시며 볶아 먹으라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검붉은 패딩 조끼와 붉은 장미가 커다랗게 그려진 몸빼 바지를 입으시고, 골목을 돌면 문 앞에 앉아계셨다가 반색하며 일어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두 딸이 중학생 무렵 학교에서 학부모 봉사단에 가입을 하고 여러 군데 봉사를 하러 다니다가 구청의 의뢰로 반찬 봉사를 시작했었다. 무연고 노인들의 반찬을 한 달에 두 번씩 가져다 드리고 말동무해드렸다. 그리고 사진 찍어 보고서를 작성해서 구청에 올리면 아이들 이름으로 봉사 시간을 인정해 주었다. 처음에 의무감으로 시작했었다. 다른 봉사활동은 영아원이나 장애우 학생시설에 단체로 했었는데, 단독으로 하는 봉사는 처음이라 어색해서 반찬만 전달하고 돌아왔다. 할머니도 데면데면하시며 별로 말이 없으셨다. 겨울에 시작한 반찬 봉사는 봄,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쉬는 일요일 아침에 새롭게 반찬을 만들어 나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식당 일을 하고 있었고 주말이면 밀린 빨래와 청소, 식구들 먹을 반찬 만들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곤 했었다. 늦잠 자고 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었지만, 반찬 봉사하는 날은 여느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전날 사놨던 식재료로 반찬을 만들었다. 두부조림, 김치, 어묵볶음, 생선 전. 연세 드신 분이라 딱딱하지 않은 반찬들로 준비하고 과일도 두어 개 준비했다. 여름에는 가끔 삼계탕도 만들어서 갖다 드리고 돼지갈비찜도 해드리면서 몇 개월이 지났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네시고 가면 기다리셨다가 반기곤 하셨다. 아이들도 먼저 할머니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지난주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안부를 묻고 했다. 구석에서 선물 받으신 햄 통조림도 아이들 먹으라고 꺼내 주시고 사탕도 쥐여주며 즐거워하셨다. 어느 날 가을이 깊어져가고 냉동고에 잘 보관하셨던 은행을 한 봉지 꺼내 주셨다. 한사코 만류했지만 할머니의 마음이 고마워 뿌리치기 어려웠다. 은행을 주워서 씻어 말리고 껍질을 까서 냉동하신 거라 꺼내서 녹으면 프라이팬에 참기름과 소금을 뿌리고 프라이팬을 흔들어 은행을 굴렸다. 불에 은행알이 익으면서 껍질이 홀홀 벗어지면 옥빛 구슬이 프라이팬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겉이 살짝 노릇해지면 이쑤시개에 몇 개씩 꽂아서 따끈한 은행알을 한 알씩 빼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일 년 동안의 봉사활동을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은행알을 넣어 돼지갈비찜을 만들었다. 살이 많은 돼지갈비를 빼 째 토막 낸 것을 사다가 먼저 지방과 기름을 칼로 잘라 낸다. 찬물에 담가놓고 시간마다 물을 갈아 주며 핏물을 빼준다. 큰 냄비에 물을 붓고 월계수 잎과 마늘 통후추를 넣고 팔팔 끓인다. 물이 끓는 냄비에 돼지갈비를 넣어 데쳐낸다. 고기를 건져 체에 담아 물을 빼고 다시 빈 냄비에 담아 놓는다. 간장, 설탕, 물, 맛술, 다진 마늘, 참기름으로 만든 양념을 섞어 절반만 고기 냄비에 붓고 센 불로 끓이다가 중불로 낮춰 10분 정도 더 끓인다. 가끔 타지 않게 뒤적이며 끓는 동안 당근, 감자, 무, 당근, 양파를 고기 크기로 큼직하게 썰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는다. 십분 지나면 고기 냄비에 야채 손질한 것과 나머지 양념을 붓고 은행을 한두 줌 올려 같이 조린다. 십오 분 정도 뒤적거려 가면서 간이 잘 배이도록 조린다. 밤이 있으면 밤을 깎아 넣으면 더 맛있다. 고기를 연하게 하려면 배를 갈아 넣거나 배음료를 넣어도 맛이 있다. 고기를 찔러보아 젓가락이 쑥 들어가면 다 익은 것이다. 한 김 식힌 후 그릇에 담았다. 여느 때보다 다른 반찬도 신경 써서 담아서 할머니 댁에 방문했다. 날이 추운데도 밖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이제 다른 분이 반찬 봉사하러 오실 거라 말씀드렸더니 많이 서운해하셨다.


그 후 식구 중 누군가 기침을 하면 냉동실에서 은행을 꺼내 참기름에 볶아 주면서 할머니 생각을 하곤 했다. 은행도 다 먹었고 이젠 먼 곳으로 이사와 할머니를 만날 순 없지만 여전히 은행나무처럼 잘 지내고 계실 거라 믿고 있다.

봄에 초록 초록 예쁜 새싹으로 우리 눈을 즐겁게 하고 가을이 오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우리를 반긴다. 거기에 은행 열매까지 우리에게 약으로 선사해 주니 이 얼마나 귀한 나무인가? 오늘도 밖을 나서면 반겨주는 은행나무에 눈길을 주며 감사하다고 인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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