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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경 Sep 14. 2023

인삼보다 더 좋은 가을 무

음식여행

가을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게 느껴지는 구월이다. 여름이 덥다고 해도 처서도 백로도 지났다. 처서는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온다는 뜻이고 백로는 흰 이슬이 맺힌다는 절기이다. 무덥던 여름도 지나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다. 아침 공원에 가면 꽃잎과 풀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이 계절의 바뀜을 실감 나게 한다.

아파트 작은 텃밭을 관리하는 유치원에서 무를 심고 팻말을 세워 놓았다. 어제 내린 비에 초록색 무 이파리들이 싱싱하게 솟아나 있었다. 무는 팔 구월에 파종하여 시월, 십일월에 거둬들인다.     

 

가을무는 인삼보다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을무는 맛있고 영양가도 풍부하다. 채소가 귀했던 예전에는 겨울 동안 무는 열량은 적고 비타민과 섬유소가 많아 비타민 공급원이기도 했다. 무는 지방에 따라 무수, 무시라고 하며 한자로는 나복(蘿蔔)이라고 한다. 무로 만든 요리 또한 많다. 무생채, 무 숙채, 무장아찌, 무 깍두기, 동치미, 무조림, 소고기뭇국, 무말랭이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음식의 재료인 무는 도화지 같은 식재료이다. 어떤 음식을 해도 색깔과 맛이 다르다. 무시루떡도 맛있고, 얇게 썰어 새콤달콤 무 쌈을 해도 좋다.

     

오랜만에 채소가게에 갔더니 무가 한 개 칠백 원이다. 얼른 두 개를 집어 왔다. 큼직한 무 두 개를 어떻게 할지 고민 끝에 무생채와 무 숙채를 만들기로 했다. 무의 껍질을 필러로 얇게 깎아내고 칼로 채 썰었다. 조금 굵게 썬 것은 무 숙채를 하기 위해 궁중 팬에 담고 일부 곱게 썬 것은 양푼에 담아 놓았다. 먼저 무 숙채 즉 무나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 담아 놓은 궁중 팬에 들기름과 식용유 두어 스푼과 소금을 넣고 처음에는 센 불에서 얇게 채 썬 양파와 같이 달달 볶는다. 어느 정도 볶아지면 중불로 낮추고 뚜껑을 덮어 익힌다. 중간중간 젓가락으로 타지 않게 뒤적여 준다. 수분이 날아가도록 볶아서 깨와 잘게 썬 파를 넣고 불을 끈다. 짭짜름하면서도 무 특유의 단맛이 배어 나와 밥반찬으로 일품이다.     


 예전에 장사할 때는 참치 서더리를 넣고 무조림을 해서 스게 다시로 내어놓곤 했다. 손님들이 밥을 부르는 맛이라며 공깃밥을 시켜 같이 먹곤 했다. 큰 무는 반을 가르고 작은 무는 통째로 큼직하게 5~6센티미터 두께로 썰어 큰 냄비에 넣고 매운 청양고추를 대여섯 개 적당히 썰어 함께 넣는다. 마늘 다진 것, 간장, 고춧가루, 설탕과 약간의 조미료를 넣고 무가 잠길 만큼 물도 붓는다. 센 불에 무를 팔팔 끓인다. 팔팔 끓는 냄비에 살점이 붙어있는 뼈째 참치를 던져 넣는다. 고춧가루를 조금 더 추가하고 중불에서 삼십 분 이상 푹 조려낸다. 참치와 무에 맛이 들어 색이 거무스런 색이 나면 물엿을 첨가해서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한 번 더 끓인다. 오목한 접시에 조린 무 한 개와 참치를 조금 올리고 다진 대파와 깨를 뿌려 나간다. 국물과 함께 술안주로도 먹기 좋게 심심하게 조려 놓으면 기본 두 접시는 먹고 간다. 만드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가지만 손님들이 좋아하니 늘 한 냄비씩 만들어 놓고 손님을 맞이하곤 했다.  

    

늦은 가을이 오면 김장도하고 무로 동치미도 담그곤 했다. 김장하기 열흘 전 청양고추에 바늘로 구멍을 송송 뚫어 소금물에 절여 고추 지를 만들어 놓는다. 동치미 무는 11월 둘째 주부터 넷째 주 사이에 나오는 천수 무로 담근다. 무가 돌처럼 단단해서 물러지지 않고 잘 익으면 아삭아삭 새콤달콤 맛있다. 먼저 무를 하루 전날 깨끗이 씻어 물을 빼고 굵은 천일염에 굴려서 소금을 묻혀 놔둔다. 다음날 항아리 안을 불로 소독하고 바닥에 마늘과 생강을 한 줌 얇게 저며서 베주머니에 담아서 바닥에 놓는다. 살짝 절인 무를 차곡차곡 담아 넣는다. 중간에 배를 껍질채로 반을 가른 뒤 같이 넣는다. 절인 갓과 소금에 삭혀 두었던 고추 지도 중간중간 같이 넣고 맨 위에 뚜껑 덮듯이 절인 갓으로 덮는다. 소금물을 짭짤하게 만들어 체에 걸러 항아리 가득 넣고, 납작한 돌로 눌러 떠오르는 것을 방지한다. 상온에서 며칠 두어 맛이 들면 김치통에 담아 김치냉장고에 보관해 놓고 겨우내 먹는다. 서울에서 정성을 다해 동치미를 만들어도 시골에 있는 시댁에 가서 먹는 동치미처럼 맛있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천수 무를 사용하시는 것도 아니었다. 시댁에서는 텃밭에 심어 놓은 맛이 잘 든 무를 뽑아 김장하고 동치미를 담갔다. 땅속에 묻어놓은 항아리에 만든 김치를 보관했다. 땅속에서 잘 익은 동치미 무를 편으로 썰어 그릇에 담아 놓는다. 지하수를 떠서 부어놨다가 무의 짠맛이 우러나면 먹는다. 새콤달콤한 동치미는 시원하게 가슴이 뻥 뚫리는 맛이었다. 겨울철 구운 감자나 찐 고구마와 먹으면 궁합이 좋다. 지금은 두 분 다 작고하시고 집에 아무도 안 계신다. 시어머니 표 동치미를 다시 먹어 볼 수 없지만 생전의 음식솜씨는 말할 나위 없이 좋았었다. 속 답답한 일이 있을 때면 추억을 부르는 동치미가 문득 생각난다.  

    

무로 인한 입시 해프닝이 있었던 적이 있다. 1964년 중학교 입학시험문제에 출제되었으나 출제 오류로 인해 학교 입학 당락이 결정되는 일이 있었다. 무즙과 디아스타제가 정답이었다. 출제위원들은 디아스타제가 정답이라고 해서 무즙을 고른 학생들은 1점 때문에 중학교에 떨어질 위기에 있었다. 무즙을 정답으로 고른 36명 학생의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교육청에 갖다 던지며 엿 먹으라고 했다는 신문 기사가 있었다. 학부모들은 교육청을 고소했고 법원에서는 무즙도 정답이라고 판결이 나는 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엿을 던지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렸겠지만, 그 당시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잘 표현하는 사건이었다.      

무는 활용하기에 따라 수없이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그 음식 하나하나 다 맛 또한 다르니 신기한 채소이다. 무는 이렇게 영약도 되고 맛있는 음식도 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식재료이다. 그러므로 무는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된다. 나도 무처럼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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