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언니와 둘이 김장하곤 했다. 언니가 바쁘니 가을이 오면 김장은 언제 하나 미리 걱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십여 년 전에는 토요일 일요일 근무는 당연했고 야근이라도 없는 날이면 감사한 마음으로 퇴근하던 시절이었다. 언니가 크리스마스 당일 하루만 쉬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언니가 퇴근하고 같이 시장에 갔다. 늦은 밤이라 장사꾼들도 문을 닫고 있었다. 몇 집을 돌아 어렵게 무와 배추를 사 왔다. 크리스마스이브날 밤 한겨울 추운 바람에 눈까지 내리는데, 마당에 있는 수도가에서 배추를 절였다. 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렸다. 남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 부르며 시내로 놀러 나가는데 언니와 나는 무와 배추를 씻고 절였다. 무를 씻어 놓으면 추운 날씨에 살얼음으로 코팅되어서 손도 시리고 미끄러워 힘들었다. 크리스마스 날 텔레비전에서 하는 영화를 보며 김치를 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선물도 파티도 케이크도 없었지만 그래도 한겨울 동안 먹을 김장이 끝나면 뿌듯했다.
강원도에 사시는 시어머님께서 김장하자고 전화가 왔다. 이십 년도 더 된 옛날이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었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다시 버스 타고 또 갈아타고 반나절이 걸려 도착했다. 시댁 마당에 배추 300 포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한편엔 총각무들이 그득했고 대파와 홍갓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어머니와 같이 11월 추운 바람을 맞으며 배추를 절였다. 밤이 깊을수록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배추가 얼까 봐 이불로 덮어 놓고 마당에 장작불을 피웠다. 배추를 반 갈라서 소금을 고루 뿌리고 커다란 통에 동그랗게 돌려 가며 차곡차곡 쌓았다. 지하수라 물은 따스했지만 추운 건 여전했다. 밤이 늦도록 장작불을 쬐며 배추 절이고 총각무를 다듬었다. 총각무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갓 뽑아다 놓은 무도 손질해서 씻어 놓고 총각무도 씻어서 절이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시아버님은 식구들이 추울까 봐 아궁이에 불을 지피셔서 방바닥이 절절 끓었다. 어머님은 노란 냄비에 아침에 하신 순두부를 데워 주셨다. 뜨끈한 순두부를 먹으니 노곤하니 온몸이 녹아내렸다. 따끈한 방에서 몸을 누이고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배추를 한번 뒤집어 위에 덜 절인 배추와 밑에 잘 절인 배추의 위치를 바꾸고 전체적으로 고루 잘 절여지게 꼭꼭 눌러 놓았다. 아침을 먹고 찹쌀 풀을 한솥 쑤어서 식혀놓았다. 마늘과 생강을 절구에 찧어 놓았다. 대파와 양파, 홍갓도 씻어 썰고, 집안의 커다란 양푼은 다 동원해서 야채를 썰었다. 무채는 아버님과 애들 아빠가 채칼로 서너 양푼을 썰어놓았다. 그때쯤 시누이들이 도착했다. 무채를 버무리고 절여놨던 배추를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돌아가며 엎어 놓았다. 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 분업했다, 버무린 무채 양푼에 고무장갑을 끼고 배춧속을 넣는 사람, 물 빠진 배추 나르는 사람, 김치통 채우면 바꿔 주는 사람, 김치가 다 된 통을 뒤꼍에 갖다 땅속 항아리에 넣는 사람, 서로 손을 맞추어 가며 일을 했다. 그래도 배추가 많으니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날밤이 새우며 배춧속을 넣다 보니 등이 뻣뻣하니 나무등걸이 된 느낌이었다. 양념이 다 떨어질 때까지 김치를 버무리고 남은 양념에 깍두기 무와 소금을 넣어 담았다. 지금 생각하니 김치공장이 따로 없었다. 저녁에 시작한 배추 속 넣기는 날이 훤히 밝아올 무렵 끝이 났고, 그래도 남아있던 배추들은 땅속 항아리에 들어갔다. 새콤달콤 맛있는 백김치로 변신할 것이다. 어머님은 겨울이 깊어지거나 설이 오면 메밀을 갈아 걸러서 백김치를 쭉쭉 찢어 넣은 메밀 적을 만들어 주시곤 하셨다. 고소한 들기름으로 무쇠 솥뚜껑에 부친 메밀 적은 입안에 착착 감기곤 했었다.
이제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우리 집 먹을 것만 하다 보니 양이 많이 줄었다. 아파트에서 배추 절이기는 힘들어서 이제는 절임 배추로 60킬로씩 주문해서 사용한다. 원하는 날짜에 잘 절인 배추를 갖다 주니 김장도 할 만하다. 그래도 이제 나이가 드니 힘이 든다.
먼저 총각김치를 하기로 했다. 황토흙에서 자란 적당한 크기의 총각무를 2500원씩 6단을 사고 갓도 한단, 깐 마늘도 두 봉지 2킬로 구입했다. 고춧가루는 인터넷에서 좋은 고춧가루를 할인해서 팔면 미리 사서 김치 냉장고에 넣어 놨다가 사용한다.
총각무는 진흙밭에서 자란 것으로 사면 무가 단단하고 칼칼하게 매운맛에 끝맛이 달큼하다. 김치를 해 놓으면 감칠맛 나는 총각김치가 된다. 진흙이 묻은 총각무를 물에 담가 놓으면 흙이 녹는다. 손으로 살살 문질러 씻으며 뽀얗고 하얀 무가 맛있게 드러난다.
씻어 건진 총각무는 소쿠리에 건져 물을 빼고 굵은소금(국산소금을 써야 많이 짜지 않고 은은한 단맛이 난다)을 훌훌 뿌려서 한 시간 정도 절이고 한번 뒤집어서 다시 한 시간 절인 후에 다시 씻어준다. 총각무나 열무 종류의 야채들은 씻을 때 살살 씻어야 풋내가 나지 않는다. 씻어 건져 물이 빠질 동안 양념을 한다. 무가 크면 반잘라서 사용한다. 커다란 양푼에 갈아 놓은 찹쌀풀, 액젓, 새우젓, 설탕, 생강, 마늘, 매실청, 고춧가루를 넣어 잘 버무린다. 고춧가루가 양념 속에서 불어나면 대파, 양파, 쪽파 썬 것과 홍갓, 알타리를 넣고 살살 버무려 통에 꼭꼭 눌러 담으면 총각김치 완성이다.
배추김치는 일주일 뒤에 하려고 미리 절인 배추를 주문해 놓았다.
김장하려고 한날 오전에 배추가 도착했다. 미리 야채들을 다듬어 씻어 건져 놓는다.
절인 배추는 김장하기 두 시간 전에 박스에서 꺼내어 바구니에 엎어 물을 뺀다. 그동안 썰어 놓은 무채에 붉은 물이 들도록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다.
여기에 찹쌀풀, 마늘, 생강 간 것, 새우젓, 액젓, 설탕, 매실청을 넣어 걸쭉해지도록 잘 버무린다. 여기에 대파, 미나리, 홍갓 양파, 쪽파 썬 것도 넣는다. 배추 속 양념은 짭짤해야 배추에 버무려 넣었을 때 간이 잘 맞는다. 양념준비가 다 되면 물 뺀 배추의 겉잎부터 양념을 조금씩 넣으며 김치를 만든다. 양념 속은 애들 아빠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버무려 놓고 수육을 준비하는 동안 큰아이와 둘이 배추양념을 했다. 김치통에 꼭꼭 눌러 담고 초록색이 나는 배추 겉잎을 떼어 뚜껑처럼 김치 위에 올리고 소금을 조금 뿌렸다. 배추김치 완성.
애들 아빠는 김장하면서 남는 생강과 마늘을 넣고 된장도 조금 푼 물에 돼지고기를 삶아 수육을 만들었다. 김장 끝내고 수육 한 접시와 굴, 배추 속과 절인 배추와 함께 먹으니 김장하며 쌓인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예전에는 김장을 하려면 양이 많아서 양념준비에도 이틀 삼일 걸리곤 했었다. 김장이 끝나고 나면 너무 힘들어서 늘 김장철이 다가오면 걱정이 산이었는데 이젠 꾀가 생겨 나눠서 하니까 금방 끝나고 힘도 덜 든다. 그만큼 덜 하는 탓도 있지만 한동안 김치 걱정 없이 지낼 것을 생각하니 어려운 과제 하나 끝난 듯 속이 시원하다. 맛있게 익어서 식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