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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경 Sep 22. 2024

순두부와 모두부

음식여행

추석이 지나고 비가 한번 내린 뒤 썰렁하니 기온이 내려갔다. 이런 날이면 시어머님이 만들어 주셨던 순두부와 모두부가 생각난다. 하얀 순두부를 처음 먹어 본건 오래전 원주역에 갔을 때였다.

어느 겨울 이른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을 찾았다. 순두부 파는 집이 있었다. 여행을 갔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구랑 같이 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옆에는 오래된 급수탑이 으스스한 그림처럼 서 있었다. 손이 시려 입김을 호호 불며 식사할 곳을 찾았다. 안갯속에 흐린 불빛을 따라 들어간 음식점엔 메뉴가 순두부만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하얀 순두부와 흰쌀밥을 한 공기 내어주셨다. 반찬은 양념장과 김치가 다였지만 따뜻한 순두부를 한 수저 입에 넣자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따스함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달큼하고 짭조름하면서도 마음까지 따스하게 녹여 주었던 그 맛. 처음 먹어보는 순두부였지만 새벽안갯속의 차가운 공기와 더불어 먹는 그 맛은 온몸 가득 따스해서 좋았다.   

   


결혼하고 그 이듬해 가을 벼수확하는 것을 도와드리러 시부모님 댁에 내려갔었다.

남편과 갓난쟁이를 업고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벼 베기 하기 전날이었다. 어머님은 뒤란에 있던 돌로 된 맷돌을 가져오셨다.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윗돌과 아랫돌을 맞추고 나무 손잡이를 끼우셨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안착시키시고 불린 콩을 구멍으로 조금씩 넣으며 맷돌을 돌리기 시작했다. 직접 맷돌로 콩 가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콩이 들어가면 잘 갈아진 되직한 콩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스르륵스르륵 맷돌이 빙글빙글 돌 때마다 나오는 콩물. 바닷속 어딘가에 하염없이 소금을 만들고 있다는 전설의 맷돌이 생각났다. 쌀 나와라 하면 쌀이 나오고 돈 나와라 하면 돈이 나온다는 전설의 맷돌. 욕심 많은 뱃사공이 귀한 소금이 많으면 부자가 될 거라 생각하고 소금 나와라 외쳤다가 쉬지 않고 소금이 나와서 배가 가라앉아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소금이 나오는 맷돌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어 바닷물이 짜다는 옛이야기. 그렇게 어머님은 콩을 갈고 계셨고 나는 일복으로 갈아입고 옆에 앉아 콩 가는 것을 도와 드렸다. 대야에 콩을 다 갈고 나서 커다란 삼베 자루에 콩 간 것을 담아서 짜기 시작했다. 기다란 막대를 이용하여 자루를 비틀자 콩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꼭 짠 뒤 사랑채 아궁이에 올려져 있던 커다란 무쇠솥을 깨끗이 닦으시고 솥에 콩물을 부었다. 콩물을 짜고 난 콩비지는 신김치를 넣어 콩비지 탕을 해 먹으면 맛있다. 어머님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면서 콩물이 바닥에 눋지 않게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잘 저어주면서 끓였다. 어느 정도 끓어오르자 소금 가마니를 밭쳐두었던 자배기에서 간수를 떠다가 나무 주걱으로 끓고 있는 콩물 위에 고르게 뿌리셨다. 끓어오르는 콩물을 다독다독 아기 달래듯 간수를 뿌리자 콩이 물과 분리되면서 몽글몽글 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불타고 있는 장작을 꺼내어 불 조절을 하시고 어느 정도 순두부가 엉기자 고무 대야에 삼베 자루를 잡으라 하셨다. 자루에 붓기 전 바가지로 양은 냄비에 순두부를 한 냄비 따로 퍼 놓으시고 삼베 자루에 순두부를 바가지로 퍼서 부으셨다. 순두부를 붓자 삼베자루는 미끄럽고 뜨거웠지만 행여 놓칠세라 안절부절못하면서 자루를 꼭 붙들었다. 네모난 플라스틱 두부판에 삼베 자루를 올리고 무거운 돌을 올려 모양을 잡았다. 돌의 무게로 순두부는 네모난 모두부가 된다. 그날 저녁 밥상의 메인요리는 두부였다. 모두부를 칼로 한 모퉁이를 자른 뒤 먹기 좋게 썰어 접시에 올리고 양념간장 만들어서 상에 올렸다. 모두부를 잘라서 간장 찍어 먹거나 김치와 같이 먹어도 고소한 감칠맛이 난다. 어머님은 아버님과 큰아들에게 커다란 그릇 가득 순두부를 담아 주셨다. 아버님도 남편도 갓 만든 순두부를 늘 즐겨하셨다. 다음날 벼 수확하면서 이른 새벽 새참으로 얼큰하게 고춧가루를 넣은 두부장과 막걸리를 일군들에게 대접했다. 두부장은 고춧가루, 들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한 뒤 잘박하게 졸인 두부찌개 같은 음식이다.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면 술안주로 내어 주기도 한다. 점심엔 모두부와 김치 그리고 제육볶음을 만들어서 대접했다. 새참 두 번에 세 번의 식사 그리고 저녁 술상까지 빠짐없이 두부가 등장했다. 직접 만든 두부는 고소하고 달았다.     


순두부찌개를 했다. 봉지 찌개 양념과 양파, 애호박을 썰어 넣고 보글보글 끓으면 순두부 한 봉지 배를 반으로 가르고 끓고 있는 뚝배기에 조심스럽게 순두부를 넣는다. 센 불에서 한창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달걀을 툭 깨어 한 개 두 개 세 개를 넣는다. 우리 식구들 모두 순두부찌개에 들어간 달걀이 수란이 되면 국물과 같이 덜어 먹는 걸 좋아한다. 순두부를 마구 휘저어 먹는 것보다 국물에 잘 조려진 순두부와 수란을 떠서 따끈한 밥 위에 올려 먹으면 순식간에 밥도둑이 된다.      

같은 두부라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두부는 도화지 같다. 간장을 곁들여도 김치를 곁들여도 기름에 구워도 두부장을 해도 다 맛이 다르다. 순두부 또한 마찬가지다. 짬뽕 순두부, 하얀 순두부, 해물 순두부, 순두부 치즈 그라탱, 순두부 계란찜 등등 단백질이 풍부한 두부로 만든 음식은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건강한 음식이다. 추석이 지나고 비가 오고 나자 날씨가 싸늘해졌다. 따끈한 순두부찌개 한 그릇으로 몸과 마음을 데우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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