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2주 동안 살아보기
Day 9
송당리를 떠나는 날이었다. 아침마다 지저귀던 새들 소리가 그리울 것 같아서 피곤한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청보리밭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걱정 없이 자유로운 비행을 누리는 새가 부러웠다. (하지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는 말처럼, 닥친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열심히 날갯짓할 수밖에 없는 새를 자유롭다 부러워 한걸 지도 모르겠다.)
체크아웃을 하고 송당리에서부터 약 한 시간을 달려서 넘어온 섭지코지. 휘닉스 리조트 입구랑 같아서 처음 방문인 나에게는 주차장 찾다 조금 헤맨 곳이긴 했지만, 막상 섭지코지 입구로 들어서니 맑은 날씨에 얼른 산책하고 싶어 졌었다. 유명 관광지이면서 리조트가 같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어린 아기부터 어르신까지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아 보였다.
글라스 하우스 안에는 (폐유리조각 같은) 조금 특별한 재료들로 다양한 선캐처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관이 있었다. 환경보호와 공예체험의 두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유리조각 모서리들은 작고 둥글게 갈려져 있었다. 또 자리마다 제작방법 영상을 볼 수 있게 세팅되어 있는데, 그 외에도 상주 직원분이 제작 팁을 매우 친절히 알려주셨다. 잠시 구경하러 들어간 글라스하우스에서 예상치 못하게 선캐처 만들다 한 시간 반 뒤에 나온 사람 나야 나.
글라스 하우스를 나와서 또다시 걷다 보니 언덕 아래로 성산일출봉이 가까이 보이고, 풀을 뜯는 말 친구들도 보였다.
미리 온라인 예매를 하고 방문한 유민미술관은 섭지코지 내에 위치한 미술관인데, 일본 오사카 출신의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로 제주의 바람과 빛, 소리를 느낄 수 있게 만든 공간이라고 하는데, 제일 장관인 점은 정면 돌담에 작게 난 창쪽으로 관람객이 다가갈수록 바다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제일 가까이 창 앞에 다가섰을 때 성산일출봉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는 창 너머의 성산일출봉이 액자 프레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같이 장관이었다.
다시 꼬불 길을 내려가 들어간 유민미술관 전시장 내부는 다소 어둡지만 사실상 전시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기획한 부분이 작품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주었다. 여러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관람했던 것 같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간단한 식사 후에, 구좌읍에서 소품샵으로 유명한 달리센트에 들렸다. 상호명에 ‘센트scent’가 들어가서인지 인센스나 섬유 스프레이처럼 향과 관련된 소품들이 정말 많았다. 평소 집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휴식하고 싶을 때 켜 두는 캔들이나 인센스 향을 좋아하는 나는 다양한 종류에 눈이 돌아갔다. 특히 편백나무와 숲, 풀 계열의 향을 좋아하는 나는 사장님께 '센슈얼 인센스' 히노끼 향과 '콜린스 룸넘버 11'을 추천받았다. 스틱 자체의 향을 맡았을 때도 편백향과 흙향이 가득했는데, 집에 와서 태웠을 때도 자연의 향이 한가득했다. 또 제주의 오름을 주제로 만들어진 미니 사이즈의 섬유 스프레이가 있었는데,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에도 좋아서 몇 개 구입했다. (따라비, 아부, 새별을 구매했는데 이름도 너무 예쁘다.) 그 외에도 바디솝, 치약, 바디크림도 있었고 와인이나 커피 원두 등도 판매되고 있었다. 달리센트는 무엇보다 허허벌판에 위치한 폐건물 안에 우드 고가구와 실제 나무판자, 다양한 식물들을 적절히 매치한 공간이었는데, 제주 이미지에 어울리는 ‘쉼’ 컨셉의 인테리어와 사장님의 미적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달리센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이피기팬트리는 미니미한 그로서리 스토어이다. 감자칩이나 쿠키 같은 간식뿐만 아니라, 잼과 소스, 파스타면, 주방도구, 다양한 와인까지 진열되어 있어, 구좌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이 간단한 음식과 주류를 구입해 숙소에서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상품 하나하나가 유니크해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외국 식료품점에 온 기분이 들게 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홀린 듯 구경하다가 정신 차리고 튜브형의 밤잼과 과일잼, 감자칩 정도만 구매했다.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돌아가는 캐리어가 더 무거워질 것 같았다.)
제주 동부 쪽에서의 두 번째 숙소는 취다선 리조트. 제주 여행 숙소를 알아보는 중에 인스타그램에 떴었던 취다선 리조트는 1인 객실 + 조식 포함에 요가와 명상 클래스를 무료로 들을 수 있어 가성비가 좋아 얼른 예약한 곳이었다. 로비부터 꾸며진 다양한 화분과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명상 음악, 물소리, 그리고 팔로산토 혹은 인센스 향이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체크인 시 안내를 받으며 듣기로는 리조트 내 고요함을 즐기고 휴식이 필요한 여행객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1인 또는 2인 객실은 동일한 구조인데 예약금액에 약간의 차이를 두었고, 2~4층 중에서 순차적으로 배정받는다. 나는 2층을 받았고, 다음날 나와 잠시 합류한 직장동료는 4층을 배정받았는데, 확실히 고층이 더 좋기는 하지만 전 객실이 바다 뷰를 즐길 수 있게 되어있어, 어느 곳이든 바다멍이 가능하다.
취다선 리조트에서는 1박당 1회에 한하여 티클래스를 미리 예약 후 시간에 맞춰 들을 수 있는데, 아마도 이 시간에 예약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운 좋게도 뷰가 가장 좋은 차실로 배정받았다. 클래스 초반에는 티 마스터가 다기 명칭과 용도, 티의 효능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티가 우려 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제주에 혼자 여행 온 이유, 여행 다니면서 방문하고 보았던 것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제주에서 요가를 하면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 (아사나 수련 중 신체적 한계를 넘지 못했을 때의 아쉬움과 그런 내 몸을 원망하게 되는 부정의 끝)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는데, 결국 요가에는 끝이 없고,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내 몸과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임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티 마스터와의 차담이 끝나고 티룸에서 혼자 남은 시간을 보내며 티를 직접 우려 볼 수 있었다. 앞서 배운 다도를 실습하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나는 차가 우려 지는 시간 동안 창문 너머 펼쳐진 아름다운 날씨와 초록빛 자연, 고요한 물소리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여러 가지 복잡했던 머릿속을 차분히 가라앉혔던 것 같다. (평소라면 그 시간에 사무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을 나를 생각하며 참으로 감사했다)
티클래스가 끝난 뒤, 바로 명상하타요가 클래스를 참석했는데, 시작 전 넓은 요가룸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취다선 리조트 요가 클래스는 내 내면에 깊이 집중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수업시간 중의 스마트폰 사용은 지양되었다. 오히려 그 덕에 나는 순간순간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고,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은 뭔가 아사나 완성에 집중한 요가였다면, 취다선 리조트에서의 요가는 조금 더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느낌이 들어서 어렵고 낯설었지만 수업 지도자의 흐름을 따라 할 수 있는 만큼 집중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어가는 시간이었다.
저녁 8시쯤 클래스가 끝나고, 객실에서 이것저것 씻고 정리하다 보니 밤 11시쯤 되어서야 누웠다. 워낙에 리조트 주변에 뭐가 없어 밤이 되면 어둡고 조용한 곳이었고, 소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객실에서도 조용히 해야 하는 리조트 정책도 있어 이 하루를 정말 자연 속에서 고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차분함 속에서 쓴 일기장에는 자연스레 나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제주에서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게 아쉽다고 적혀있었다. 그때처럼 나 스스로를 관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앞으로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