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나요?12화
자료정리가 끝나고 작성한 리포트에 적용된 수식을 약간 수정하고 나서야 그녀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약간 열린 창문틈 사이로 아직 차오르지 않은 여름 바람의 습기가 조금씩 들어왔다. 그녀는 무언가 불안을 느꼈다. 직각의 모양 그대로 잠이 들기 시작한 도시의 모든 것들 그리고 창 밖의 것들은 밤의 장막 안에 놓였다. 그러나 수연은 두 눈을 옅게 뜬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불안이 느껴진 탓일까 수연의 귀엔 스치우는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고, 나무가 소리를 내는 것 같았고, 그건 마치 바람이 부서지는 소리와 흡사했다. 그대로 부서지는 바람은 어렵지 않게 수연의 잠을 방해했다. 바람이 모든 곳에 닿아서 더 이상 소리 낼 것이 없어졌을 때, 수연은 잠에 들기 위해 힘을 들이고 있었다. 모든 이가 그렇듯 하루의 끝에 처량히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불안은 수연을 바다에 빠트린 거 같았다. 그래서 수연은 부력이 강한 것들이 필요했다. 이것저것을 찾아보았다. 수연이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수연이 불피어 오른 어떤 것이었다. 그렇게 삶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그 남자에 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건 그 남자가 좋아서거나 그 남자가 재밌어서 어떤 편안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어떤 의미를 찾지 않으면 그대로 놓여진 바다에 한없이 가라앉을 것 같아서 그 남자에 관해서 생각을 걷지 못했다. 그 남자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서 이제는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모든 것이었다. 준비하고 있는 시험, 과외하는 학생의 공부같은 것에서 의미를 찾고 있었고, 그게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직각의 햇빛이 수연의 눈을 쨍하게 비추었다. 수연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약간의 느림을 느끼는 모습. 상체만 일으키곤, 이불을 껴안았다. 바람이 자아내는 멜로디와 수연이 갖는 생각 사이의 랩소디는 아침에서도 지속되었다. 결국 그 몸을 천천히 이끌어서 식탁 앞으로 나가 앉아선 아침을 차려먹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건 그닥 내키지 않아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점심. 몇시간의 자세한 생각 그 이후가 되어서야 천천히 스며드는 노을의 색깔. 그때가 되어서야 수연은 고개를 들고, 시간이 어느덧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노을이 약간의 빛을 유지하기 시작했을 때 수연은 혜원을 만나려고 했다는 것을 떠올리곤, 샤워기에 몸을 맡겼다. 쏴아.
떨어지는 물 그리고 젖어드는 머리결, 수연은 꽤 짧은 시간만에 몸을 씻고 나서는 문을 열고 노을로 향했다. 과제와 기말 그리고 여러 삶에서 바빴던 수연은 떠들석한 기분이 생겼고, 혜원을 만나는 것이 기대되었다.
프랑스 음식점에서 만난 그 애는 여전하게도 그 고양이같은 눈웃음으로 먼저 와 있었고, 수연은 어떤 전언같이 다가오는 그 모습에 꽤나 기쁜 것을 쉽게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혜원과 수연은 그렇게 번잡스러운 인사를 나누었다. 수연은 혜원이 반갑게 맞이한다는 것을 확인해서야 더 나은 기분과 편안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잘나가는 메뉴를 두 개 주문했다. 기다리는 시간, 혜원은 요즘 음악에 관심이 많아져서 여러 페스티벌을 가고싶어서 티켓 구하는 것에 아주 혈안이 되어있다면서 수연에게 본인이 가서 즐길만한 인디밴드의 공연이 있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디밴드 여럿을 즐겨 들었던 수연은 축제에서 즐길 만한 것은 어떤 밴드가 있고, 축제를 가기 전에 꼭 들어봐야 하는 곡이 있다면서 그 인디밴드의 두 번째 앨범을 들어보라고 했다.
음식이 나왔고, 혜원은 사진을 찍었다. 수연은 여러 색깔로 빛나는 플레이트, 사진을 찍고 있는 혜원을 여러번 훑었고, 앞에 앉은 사람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야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그 애가 찍힌 사진을 확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동반된 약간의 표정이 있었지만 혜원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그리고 먹기 시작하였다.
혜원의 눈은 수연의 눈과 음식으로 진자운동하듯이 그 두가지를 반복해서 보았다. 그리고 수연은 옆 테이블, 주방, 혜원의 몸짓과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혜원이 하는 많은 이야기에서 의문을 조금씩 느꼈다. 그건 그 애가 하는 이야기가 말이 안되고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앞에 앉은 이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혜원은 자신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였고, 한 번의 포크질은 혜원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서 같이 들고 나왔다. 천천히 이야기가 반복되고, 접시는 비워졌다. 수연은 자기가 한 이야기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답습하고 있었고, 혜원은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끼며 수연에게 나가서 수다나 더 떨자고 말했다. 수연은 좋다고 했다. 사실 수연에게 크게 끌리는 것은 없었지만 혜원이의 작은 입이 부드럽게 말려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그 미소가 떠나는 것이 그닥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그 생각이 수연의 행동을 계속해서 불러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연의 행동은 약간의 과장이 있었다. 혜원은 그것을 보고 뭔가 이질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괜찮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거 같아서 본인도 약간 이를 보이는 미소로 분위기를 대체했다.
원래는 카페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혜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간판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고풍있는 술집. 술집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초여름에 피어난 옅은 습기가 소리의 밀도를 더했다. 혜원은 수연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눈빛을 보냈다. 수연은 들려오는 음악을 먼저 듣고, 그 고풍스러운 술집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동의의 눈초리로 화답했다. 혜원은 자기가 요즘 듣는 노래가 이런 고즈넉한 분위기의 음악이라며 이런 선곡은 정말 너무 좋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그 말에 걸맞게 스피커 소리가 아주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혓바닥이 미끄러워진 듯한 느끼함에 혜원과 수연은 맥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맥주와 달달한 샤베트를 시켰다. 직원은 생맥주를 가득 따라서 그들의 자리로. 그들은 바로 맥주를 들고 마치 약속한 듯이 테이블 위로 잔을 부딪혔고, 테이블에 잔을 붙인 채로 부딪힌지라 소리가 작게 났다. 그리고 나오는 샤베트. 수연은 아까 음식점에서는 다르게 꽤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혜원은 그때마다 탄성으로 구색을 갖춘 답변으로 크게 공감을 했다. 그리고 수연은 이야기가 재밌는지 계속해서 확인했다. 수연은 혜원이 느끼는 감정이 정말로 자신과 같은 지 의문이 들어서 계속해서 이 이야기가 괜찮냐는 식의 질문을 던졌다.
혜원은 당연하다는 식의 말을 하며 맥주를 더 시켰다. 천천히 비워지는 잔과 더해지는 취기. 농도가 짙어진 습기, 취기 그리고 약간의 열기 세가지. 천천히 분위기는 여름의 밤을 향해가고 있다. 아랫배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녀들은 서로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의 눈치를 챘다. 몇 잔이나 마셨는 지 얼마만큼의 이야기를 나누었는 지 알 수 없었다. 수연은 신경쓰고 있는 것이 많은 탓이었고, 혜원은 너무나 즐거운 탓이었다. 어찌되었던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그 자리 그대로 영화같이 남겨진 둘은 이제야 영화의 스크린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다. 식당에서 나온 혜원은 아쉬움에 사로잡혔다. 마치 젠가를 하듯이 아슬아슬하게 취기가 올라온 혜원은 지금까지 쌓아올린 취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이왕 무너뜨릴 것, 조금 더 큰 소란을 원했다. 혜원은 수연에게 노래를 부르러 가자 했고, 수연은 약간 옅게 뜬 눈으로
’그거야 뭐‘라고 하며 혜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수연은 혜원의 얼굴에 퍼진 웃음이 사그라들지 않기를 원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수연은 어디선가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 고개를 확 들었다. 욱.
아까부터 옅게 뜨던 눈이 갑자기 확 뜨였고, 수연은 형용할 수 없는 메스꺼움에 하수구에 구토를 해버렸다. 혜원은 갑작스러운 친구의 모습에 당황했고, 수연에게는 오히려 확 명징한 정신상태가 찾아들었다. 그리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연은 비가오면 씻겨 내려갈 것이란 생각을 잠깐 하곤,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엔 혜원. 초여름의 미적지근한 공기가 코를 들쑤셨다. 혜원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얼굴로 수연과 하수구를 번갈아보았고, 고개가 아플 때에 이르러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술집 옆 골목길엔 노르스름한 가로등만이 그들을 감시하듯이 서 있었고, 그건 다행이라는 생각을 불러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연은 본인이 왜 토를 했는지 모르겠었다. 그런데 확실한 건 그렇게 토를 한 이후부터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즘 혜원은 아까 그 술집에서 휴지 몇 장을 빌려왔다. 혜원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수연에게 휴지를 건내고, 등을 쓸어줘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수연은 휴지를 받아들었고, 입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혜원은 등을 쓸어주었다. 수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건내고 화장실로 향했다. 수연은 입을 헹구고, 아까의 시큼한 냄새가 남긴 맛이 임 안에서 옅게 맴돌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다행히도 머리를 묶고 있던 터라 약간 산발이 되었을 뿐 머리카락에는 묻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혜원이 화장실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괜찮은거야?’
수연은 입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 지 확인하곤, 혜원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혜원은 걱정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고, 수연은 약간 웃어보였다. ‘엄청 시원한데?’
혜원은 눈을 약간 찡그렸지만 다시 한 번 정말 괜찮냐고 물었다. ‘그럼. 나 간이 파업했나봐. 아니면 위가 파업했나.’ 수연은 답했다. 이번엔 혜원의 눈이 더 찡그려졌다. 수연은 머쓱하게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아 정말 괜찮아! 진짜래도 아 이따가 노래부르는 데 입냄새 나는거 아냐?’ 수연은 머쓱한 것을 이상한 농담으로 무마하려했다. 혜원은 천천히 웃어보이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혜원은 더 노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고, 수연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혜원은 밖으로 나섰고, 수연은 뒤를 따랐다. 문득, 수연의 머릿속에 설이가 떠올랐다. 단호박죽을 해주고, 괜찮다고 이야기하던 설이가 떠올랐다. 설이가 보고싶어지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수연이 정말 괜찮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아까 그 젠가를 신나게 무너뜨렸고, 취기가 거의 완전히 가신 뒤에야 서로의 집으로 향했다. 수연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곧바로 양치를 했다. 수연은 혓바닥에 감도는 그 시큼함이 싫어서 몇 번이고, 혀를 더 닦았다. 치약 특유의 향이 매워질 때가 되어서야 입을 헹구고 물을 꺼버렸다. 옷을 갈아 입고 잠에 들었다. 수연의 밤은 더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