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랜드 Sep 07. 2024

엄마의 가계부

나를 사랑하나요? 13화


 

 풀이 새벽에 젖어갈 때쯤이 되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잠에서 깨어나는 날에 그 시간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꼭 그때엔 기억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그 기억을 통해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을 잠에서 깨어난 채로 꾸곤 한다. 그리고 26살의 수연이도 그리고 대학교 2학년이 된 수연이도 새벽이 풀 아래로 쓸려나가는 시간엔 잠에서 깨곤 했다. 그것은 가끔이기도 그것은 여러 때였다. 이제 고작 하나의 감정 때문에 일어나는 법은 없었지만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에 예리해지는 것은 하나의 감정이었다. 궁금증.


그건 어떤 감정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막연했다. 그리고 생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그니까 이성으로 표현되기엔 합리적이지 않고, 그저 감성으로 포장해 버리기엔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끊임없이 삐져나와서 포장되지도 표현되지도 않는 것이었다. 마치 사막의 모래를 한 줌 쥐어든 기분이었다. 손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모래는 손으로 주어 담거나 옮길 수 없다. 손으로 덮는다 해도 그건 또 다른 모래가 보이는 것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는 사막에 비가 내린 듯 한 줌 한 줌 모래를 퍼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기억을 퍼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연은 이제 하나의 사물을 보고 단순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의 세계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세계다. 언제 어느 곳에서 감정이 피어나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것들이 끊임없이 피어난다는 것 그리고 연쇄적으로 수연의 기억들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불려 온 기억들은 천천히 삶을 더해가고 있었다.



 수연이 보고 자란 많은 이들도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도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서로의 기억을 확인해 가면서 세상에서 박리되기도 하고 일상에 스며들기도 한다. 기억은 그런 역할을 한다. 그들 서로를 비끄러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근하게 서로 비슷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 기억들로도 서로가 얼마나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을 통해서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수연이가 나와 가장 가깝다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했고, 그녀의 엄마도 내게 그저 엄마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기억이지만, 수연이 나를 인식하기 전, 그 한참 전부터 수연을 알고 있었다. 그때에도 그녀의 엄마는 내게 엄마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수연의 엄마를 그저 엄마라고만 표현하는 게 적당했다.


 내가 어떤 시절의 기억인지는 상관이 없다. 왜냐면 모든 시절의 기억은 마치 영화를 틀듯이 1인칭의 관점에서 재생된다. 사람들은 관객 없고, 극장 없는 영화를 갖는다. 영화배우가 삶을 사는 것처럼 그리고 배우가 영화 속에서 삶을 사는 것처럼 기억은 단편의 영화에서 또 한 번 삶을 살게 된다. 그렇기에 어떤 시절의 기억인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수연의 영화이다. 그리고 수연이 나를 친구로 부를 때가 바로 그때였다. 26살. 엄마의 가계부가 궁금해졌을 때. 그때가 처음으로 수연을 기다리는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내가 그 아이와 직접 마주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순히 하나뿐이었다. 수연은 분명히 자기만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 엄마만이 유일한 세계였던 수연은 언젠가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덕분에 지금 그녀는 본인만의 삶을 유지하는 듯했다. 여름밤, 엄마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를 만든 이가 세계를 무너트리는 순간만큼 기가 막힌 광경은 또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안의 있는 모든 것을 뒤져보아도 그렇게 기막힌 것을 찾긴 힘들었다. 신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일지 모르겠지만 수연이 생각하기에 그녀가 한 행동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연 또한 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이라 생각되는 걸로 상황을 뒤덮어 버렸다. 그건 수연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행동일지 모르겠다.


이제 그녀는 드디어 궁금증이 다시 들었다. 가계부는 어떤 것이 쓰여있는지 분명 엄마는 그곳에 어떤 무언가를 적어놓고 떠났을 것이다. 단 하나의 확신 하나만으로 다시 세계를 건설할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로 엄마가 그곳에 무언가 적어두고 떠났다거나 그곳에 적힌 단서들로 그 겨울날 엄마가 떠나간 이유를 알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수연은 믿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은 마치 샴페인을 따는 것과 같다. 압력이 순식간에 바뀌는 순간 샴페인은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소리를 내며 뚜껑을 연다. 그러나 그녀가 무엇을 딴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믿음 하나로 만들어진 확신으로 본인의 무너진 세계를 다시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방 안에 놓인 화분이 눈에 들어왔고, 화분은 창문 옆 선반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26살의 수연은 드디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7년 전 그렇게 몸을 일으킨 것처럼 똑같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엔 엄마가 스스로 떠나가버렸다는 것을 믿었고 그래서 본인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건 어찌 보면 회피에 가까웠다. 적어도 내 안을 뒤져서 내린 판단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지금, 또다시 믿음이 생겼다.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납득이 안되더라도 이유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건 마치 그녀가 세계를 만들어나가던 것과 비슷하다.


 드디어 그녀는 가계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세심하게 적어내려 갔다. 매일의 일상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니 적지 않았으리 없다. 떠나간 이유는 엄마가 적절히 적어야만 했다. 수연은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 엄마는 본인의 의지로 떠나갔다고.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고, 골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천장이 낮아지는 골방은 그녀가 현실에 놓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이 있었다. 마치 창고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주방 옆에 붙어 있는 골방은 시멘트가 희게 혹은 검게 드러나 있었고, 천장은 생각보다 더 낮았다. 낮아지는 천장이 그녀 머리 위의 공기를 지그시 눌렀고 그녀는 스위치를 켰다. 줄에 달려 내려온 조명 하나가 그대로 빛을 냈다. 둥근 조명의 위쪽에는 겹으로 쌓인 먼지가 그리고 ’턱‘ 하고 걸린 발에는 상자 무더기가 있었다. 초록색 선반 여러 개는 피스질을 얼마나 강하게 했는지 벽에 적절히 잘 붙어서 여러 물품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마치 영구한 벌을 받듯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고, 그녀는 무언가 보아선 안될 걸 본 것처럼 눈이 찡그려졌다. 딱히 더럽거나 불쾌한 건 없었지만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상자 사이를 뒤졌다. 분명히 기억날 것이다. 그녀가 엄마의 물건을 정리할 때 사용했던 상자가 그 틈사이에 꼭 있었으니. 그녀는 넓지 않은 그 공간을 여러 번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찾아냈다. 상자, 노란색에 상아색 뚜껑의 상자. 그리고 그건 엄마의 이불 색상과 똑같았다. 그녀는 드디어 엄마가 가장 많이 쓰던 가계부를 상자에서 꺼냈다.

이전 13화 처량해지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