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당신의 분노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가

by 푸르다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다.

특히 분노가 치밀었을 때 쏘아보는 눈빛이 마치 뱀처럼 느껴진다고, 한바탕 격렬한 다툼이 있고 난 뒤에 남편이 약간의 울먹임과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계집애가 그렇게 드세서 어떻게 사냐는 말을 종종 하곤 하셨다. 어린 나의 머리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고, 사실 머리가 다 큰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분노는 쓰기에 따라 아주 유용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 배척하고 싶지 않다.






'분노'에 대한 어른들의 걱정은 아마 내가 순종적인 여성상을 따르지 못하리라는 기우에서 출발한 것이리라.

어릴 적부터 지는 것을 싫어하고, 싫어하는 일에 분노하며, 짜증도 잘 부리고, 고집도 센 나를 보며 '저게 우예 시집을 가겠노.'라고 속으로 한숨지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헛헛, 하고 웃음이 나온다. 어쨌거나 현재의 나는 기혼자이기 때문에.

미숙한 시절에 감정에 제대로 이름을 붙이지 못했기에 더욱더 감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본다. 확실히 어린 나는 육아 난이도가 낮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내가 싫지는 않다. 물론 이런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다른 문제 (격렬히 피하고 싶음)이지만.




모든 감정은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 특히 '분노'라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일찍이 깨닫고, 이를 다루는 법을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고는 한다.


나는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마 어린 시절, 나의 세상에 홀로 너무 갇혀 살았던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적절히 반응하는 법을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게 된다. 당연하게도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정확히 붙이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그것을 어떻게 발산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울고 떼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은 부모의, 선생님의, 주변 어른의 도움을 받아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차차 배워간다. 나는 그 과정을 거의 오롯이 홀로 겪어내야 했다. 어린 나를 두고 아빠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옛 방식대로 나를 키웠다. 아이란, 밥 잘 먹이고 옷 잘 입히고 마음껏 뛰놀게 하고 잘못을 하면 크게 혼내면 크는 존재였다.


타고난 예민함과 불안 때문에 어린 시절에 나는 나만의 세계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나는 대략 12살 이전에 친구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 정확히는 같은 교실을 공유하며 상호작용을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분노는 그런 나를 쉽게 집어삼켰다. 한 번은 별 쓸데없는 일로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거는, 소위 일진한테 찍힌 적이 있었는데 나는 어떻게 그 분노를 표출해야 할지 몰라 분노로 몸을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친구들에게도 참 미안하다.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미숙한 나의 행동에 황당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혹여나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와 그런 나를 견뎌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올린다.




사실 아직도 분노를 잘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늘어난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직장생활, 나름의 자아 성찰 같은 세월의 흔적이 쌓이며 화가 났어도 바로 표출하지 않고 최대한 누그러뜨리고 말을 하는 법이라던가 행동하는 법을 배웠을 뿐.


나는 특히 나의 상식에 위배되거나 도덕에 반하는 행동에 분노하는 경우가 많은데, 도저히 이를 완전히 웃음 뒤에 감추는 것은 흉내도 낼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일단 삭히는 것이다.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맹수처럼 이를 갈기 때문에 우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본다. 효과가 없으면 자리를 피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 가서 작게 분노를 표출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는다. 그렇게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최대한 화나는 상황을 피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넓은 아량을 가지도록 노력하게 되었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려 발버둥 치기도 했다. 주위 사람에게는 나의 노력이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노력 중이다.




이제 분노의 유용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분노의 스펙트럼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화를 낼 필요가 없는 상황과 화를 내야 할 상황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괜히 화내면서 힘을 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에너지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 있어서는 내가 무엇에, 왜 화가 났는지 곱씹어볼 수 있게 되었고,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구잡이로 화를 내며 화풀이를 하던 과거에 비하자면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분노와 불화의 신, '에리스(Eris)'는 분노는 많은 멋진 것들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로어 올림푸스(Lore Olympus)'라는 웹툰에 등장한 에리스는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에게 '분노(Wrath)'를 선사했다. 그리고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 에리스의 말대로 당당한 지하세계의 여왕이 되는 멋진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가만 보면 세상은 분노를 원동력으로 굴러간다. 인간 세상의 문명의 발전 곳곳을 살펴보면 분노가 없는 곳이 없다. 적당한 분노를 통해 인간은 경쟁심, 호승심, 향상심을 얻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영화, 드라마, 연극, 소설, 만화, 이러한 창작물들은 우리의 분노를 이용해 감정을 고조하며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과한 분노는 불화, 갈등, 다툼, 심지어 폭력적인 시위와 전쟁을 일으킨다. 흉흉한 국제정세를 살피며 우리는 '역시 분노는 나빠'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분노는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


분노한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 악인에 대한 즉결심판을 바라고, 소위 말하는 '사이다' 같은 '정의 구현'에 목마른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에 질문하고 싶다.


당신의 분노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가.

그저 파괴적인 카타르시스만을 쫓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나는 분노를 통해 멋진 부산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파괴적인 분노가 아닌 창조적인 분노를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어쩔 수 없이 품어야 하는 나의 세상을 파괴하기보다는 엉망진창이더라도 번듯하게 가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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