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요소는 나를 성장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제 이다
1991년 고등학교 첫 여름 방학은 나에게 뜻 깊은 기간이었다. 이번 기회에 부족한 2%의 습관을 채우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족한 2%는 단순히 자신감, 용기, 배짱을 뜻하는 게 아니다. 감정과 감성, 즉 어느 장소에서든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배우가 대본에 따라 풍부한 호흡으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약 17년간 소극적인 태도, 습관, 언어, 호흡, 표정을 사용해 왔기에 얼굴과 말에 감정을 담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물론 억울한 일이 있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누구보다 말을 잘했다. 왜냐하면 중학교 말부터 시작되었던 실전 대중 스피치 훈련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소리 내는 연습과 남의 시선에 대해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새로운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산부에서 잘나가는 선배, 동기들의 영향이 컸다. 여기서 잘나간다는 것은 집이 부유하고, 공부를 잘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당시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보다 인성이었다. 나는 풍부한 감성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지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덧붙여 긍정적인 의식과 태도, 그리고 마음의 여유와 자신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잠시 두 눈을 감고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자. 아마 이런 친구가 한두 명은 있었을 것이다. ‘공부는 중위권 정도 되지만, 감성이 풍부해서 항상 주변에 친구가 붐비고, 매주 주말마다 이성을 만난다고 바빴던 친구’ 말이다. 전산부에서 잘나가는 선배, 동기가 바로 이런 부류였다.
나는 그들 덕분에 깨달음을 얻고 유레카를 외쳤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훈련하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습관과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고민이 많아졌다. 하교 후 전산실에 모여 대화할 때도 대화거리가 서로 달랐다. 가정환경,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와 너무도 달랐다. 어쩌면 나는 비정상적인 고등학생, 그들은 아주 정상적이고 순박한 고등학생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욱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모난 돌을 둥글게 다듬었다면, 이번 여름 방학을 통해 세밀하게 조각하여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런 각오로 열심히 훈련에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방학이 고교 3년의 시간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희망하던 캠프도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모든 훈련의 틀을 깨고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빠르게 연구했다. 물론 특별한 방법은 없었지만, 무엇보다 훈련에 대한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을 중요시했다. 여름 방학 첫날부터 나는 즉시 훈련에 착수했다.
“만약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평생 후회를 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반드시 지금 이 순간부터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나의 운명이 바뀐다. 나에겐 여유가 있다. 나에겐 여유가 있다.”
나는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외치고 외치며 지난번보다 몇 배는 더 열정적으로 훈련했다. 그래서 나란 존재가 남포동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멀리서 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면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기다리곤 했다. 나는 매일 그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훈련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지칠 줄 모르고 더욱 훈련에 몰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시기에 얼마나 절실하게 훈련을 했는지 증명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군인, 대학생, 나이 지긋한 어르신 등 그들은 나의 노력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2시쯤, 나는 훈련 장소를 용두산 공원으로 결정하고 이동했다.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들기 시작한 시간대였다. 간간이 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날씨에 가족, 부부, 연인, 관광객, 외국인 등 많은 인파가 여유와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대형 벤치 앞에 서서 이전처럼 훈련을 계속했다.
“부산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7살 이남호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소심한 성격을 없애고 대범하고 적극적인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여름 방학에 모든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낡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여 개학 후에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부산 시민 여러분!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저에게 격려의 박수를 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힘껏 쳐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야! 시끄럽다! 조용히 해! 여기가 너희 안방이야!”
순간, 너무 놀라서 뒤돌아보니 술에 많이 취한 노숙자 어른이 서 있었다. 약간 불편한 마음이 생겼지만 마무리를 짓기 위해 나는 끝까지 훈련에 집중했다.
“운명아! 길을 비켜라! 이남호가 나가신다! 나는 과거의 이남호가 아니다! 나는 다시 태어난 이.남.호.다! 운명아!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 나는 더 이상 너의 종이 아니다! 나는 너를 지배하고 개척하는 위대한 이남호다. 부산 시민 여러분!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불만에 가득찬 술 취한 노숙자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말을 했다.
“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시끄러워 죽겠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90도로 정중히 인사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나로 인해 불쾌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훈련이 아닌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나에게도 전혀 도움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힘든 자극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가 더 강해졌습니다.”
아저씨는 술이 많이 취한 와중에도 매우 당황해했다. 아마 내가 자신에게 다가와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고맙다고 하니 그런 듯했다.
“아… 뭐…. 아니, 학생 같은데 왜 여기서 이런 행동을 하지?”
“사실은 성격이 극심하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라서 말도 잘 못하고 발표도 못해요. 그래서 소극적인 생각과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이런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아, 그래? 난 또… 무슨 종교 단체에서 나온 줄 알았지. 여기 용두산 공원은 주말이 되면 으레 교회나 종교 단체에서 와서 음악 틀고 노래 부르고 고함을 질러서 정말 괴롭거든. 그런데 학생은 다른 목적으로 나왔다니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올해 몇 살이니? 학생 같은데….”
“17살 고1입니다.”
“17살? 하하하. 정말 대단하네. 그리고 아까 소리쳐서 미안해요. 아무튼 열심히 해서 꼭 학생의 꿈을 이루길 바라요.”
“네, 고맙습니다.”
나는 그와 좋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후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휴가를 나온 육군 일병 군인이었다.
“제가 아까부터 쭉 지켜보았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점심은 먹었어요? 안 먹었다면 제가 밥 사줄게요. 부담 갖지 말고 시간 좀 내줘요.”
낯선 사람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서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군인 아저씨의 눈빛을 보니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군인 아저씨와 함께 분식점에서 김밥과 라면을 먹고, 카페에 가서 대화를 시작했다.
“학생은 이런 훈련을 왜 하는 건가요?”
“네, 제가 이런 훈련을 하는 것은 소심한 성격을 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심한 성격이요?”
“네. 저는 너무 소심해서 어딜 가도 존재감이 없었어요. 항상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친구들에게 묻혀 지냈죠. 제 밥그릇도 못 챙기면서…. 그래서 앞으로는 스트레스 안 받고 당당하게 살고 싶어서 이런 훈련을 하는 겁니다.”
이런 훈련은 성격 변화 관련된 책을 보고 독학으로 해낸 것이라는 나의 말에 군인 아저씨는 눈이 동그래질 만큼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이 훈련이 성격 변화에 효과가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다. 나 또한 매우 궁금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모르겠다, 였다. 이 성격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기에 인내심을 갖고 훈련에 꾸준히 임할 뿐이었다.
군인 아저씨는 나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본인 역시 소심한 성격에 교회도 나가보고 병원도 찾아갔지만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방법을 배워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동생과 펜팔을 하고 싶어요. 동생이 정말 멋진 사람이라서 꼭 알고 지내고 싶네요.”
군인 아저씨는 내 주소를 받아 적고 본인의 부대 주소도 적어주었다. 그렇게 나와 군인 아저씨는 인연을 맺고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형이 갑자기 전역을 하는 바람에 연락은 두절되었지만, 지금도 용두산 공원에 가면 그 형이 생각날 만큼 소중한 인연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형은 나를 기억할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