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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영어교사

저희 딸은 아직 알파벳도 잘 못 쓰는걸요.

by 장수연

나는 10년 차 고등학교 영어교사이다. 그리고 8살 딸의 엄마다. 딸을 통해 알게 된 엄마들이 있다. 엄마들 모임에서 내 직업을 밝히면, 그때부터 엄마들 눈에 빛이 난다.


"엄마가 영어쌤이면 애는 얼마나 영어를 잘할까?"

"집에서 아이랑 영어로 대화하세요?"


이런 얘기를 정말 많이 듣는다. 고백하자면, 우리 딸은 아직 알파벳도 잘 모른다. 소문자 "a"를 "9"처럼 쓰는 수준이랄까.. ㅎㅎ 물론 나도 임신했을 때는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중언어(bilingual)를 쓰게 해 줘야겠다고, 다른 건 못해줘도 그것만큼은 내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W가 엉덩이 모양이라고 엉덩이 탐정 그리는 우리 딸(8세)


그런 내가 마음을 고쳐 먹게 된 것은 아이가 6살이었을 무렵이다. 아이가 한글을 떼고 나서 이제 본격적으로 영어도 가르쳐보려고 마음먹었던 순간이었다. 매일 조금씩 알파벳을 가르치는데, 아이가 너무 싫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 입장에선 왜 이렇게 쉬운 걸 못 외우지? 답답하고 조급해졌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얘 바보인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표 영어 관련 책을 보면, 영어 DVD 보여주고 영어 책 흘려듣기 & 집중듣기 하면 다 된다는데... 내 아이는 그게 안 되니까 너무 속상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면서,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선생님 같은 엄마'구나...


그리고 내가 영어를 잘하게 된 과정을 돌이켜보았다. 나는 순수 토종 한국파로, 영미권 나라는 괌에 가족 여행 가본 게 전부이다. 난 초등학교 5학년 때 윤선생을 통해 처음 파닉스를 뗐다(우리 학번까지가 중1 때 처음 영어를 배운 세대고, 우리 바로 아래 학번부터 초3 때 영어를 배우는 교육과정이었으니, 난 나름 조기교육을 한 셈ㅋㅋ). 고등학교까지 쭉 문법 주입식(영어 교육론에 아주 비추천으로 나오는 Grammar Translation Method)으로 영어를 배웠고, 수능에서 영어를 제일 못 쳤다. (T.M.I. 난 수학을 제일 잘했다.ㅎㅎ)


그런 내가 왜 영어교육과에 가서 쌩고생을 하게 되었냐 하면...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지만(이전 글 참고), '영어' 교육과에 가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교직에 큰 뜻이 없으셨던 고3 담임 선생님께서, '교사하기엔 성적 아까우니까, 대학 가서라도 마음 바뀌면 다른 길 찾아'라고, 어디에나 다 필요한 '영어'를 추천해주셔서 가게 된 것이니 말이다. 선생님 말이 그럴듯해서 들어간 영어교육과에는... 어릴 때 미국에서 태어난 애, 중학교 2년 영국에서 학교 다니다 온 애, 교육청 영어 말하기 대회 대상 출신 등등 별의별 애들이 다 있었다. 물론 나처럼 평범하게 공부 잘해서 온 애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아직도 대학교 1학년 때, 첫 번째 영어 회화 수업을 잊을 수가 없다. '줄리'라는 호주에서 온 외국인 강사였는데... doctor를 '독따'라고 하질 않나... 알아듣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짝지랑 같이 얘기해보라고 할 때 정말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가서 당장 자퇴서를 내고 싶었다. 그러던 나였는데... 지금은 무리 없이 영어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외국인과 대화할 때, 내가 교포인 줄 알았다는 얘기도 (가끔) 듣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특별한 과정은 없었다. 좋아하는 미드 보고 대사 따라 하고, 회화 학원 등록해서 영어로 말하는 연습 많이 하고... 그게 다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커서 해도 영어는 된다"는 것이다.


유아 영어 사교육 시장이 가장 성황리에 영업 중인 이유는, "영어는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좋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s) 가설(대충 설명하자면, 어떤 '발달'은 '특정 시기'를 지나면 불가능하다는 이론. 11세쯤 발견된 늑대소년이 죽을 때까지 언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더라, 뭐 이런...)을 들먹이며, 마치 이 시기를 놓치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모국어를 이미 유창하게 하고 있고, 영어는 제2 언어이기 때문에 결정적 시기 가설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영어 교육론에 나오는 대부분의 연구 결과도 '결정적 시기'는 '발음' 영역에서만 유의미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옆집 아이와도 비교하지 않고) 딸이랑 다시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육아 목표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출처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정재찬)

이 시처럼, 관찰을 잘하는 사람

자기 삶을 주인으로 살아내는 사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 어디에도 "영어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생각하는 힘은 모국어를 통해 가장 편하게 잘 길러진다.


아직도 나는 영어 문자 교육은 최소한으로 하고, 듣고 말하는 것 위주로 하고 있다.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을 정도로만 즐겁게 영어 노래를 같이 따라 부르고 하고 있다. 기분 좋을 때나 학교 놀이하자고 할 때, 알파벳 조금 써보게 하고(엄마의 사심이 너무 드러나면 절대 안 됨)...


영어든 수학이든 예체능이든 아이의 배움에 있어, 여전히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말은 "재미없어"이다.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그땐 멈추고 생각해볼 것이다. 무엇이 배움을 재미없게 하는지에 대해. 왜냐하면, 재미야말로 배움과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아이가 말했다.

"엄마, 지금부터 우리 영어로만 말하자. 지면 벌칙!! English Time~"

"OK!"

"I... My... name is Ruby. What's your name?"

"I'm Cathy. Ruby, how's the weather today?"

"It's... It's... (깜깜해진 밖을 보더니) It's 컴컴"


우리는 한참을 깔깔깔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네가 웃었으니 성공이다.

아가야, 너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렴.

엄마는 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줄게.

출처 : https://youtu.be/MPzbTJN5w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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