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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1. 2022
이혼 후 버티는 삶에 대해
중력과 공기의 무게가 느껴진 날
인생이 한 편의 소설이라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복선 같은 순간들이 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푹 빠져서 봤던 <연애시대>라는 드라마는 내가 이혼녀가 될 것에 대한 암시였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난 은호만큼 예쁜 이혼녀가 되진 못했다.)
당시 난 연애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20대 초였으나, 손예진 님이 연기한 이혼녀 '은호'라는 인물에 유별나게 공감이 갔다. 특히, "피클 뚜껑 씬"이라고 불리는 장면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은호가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는 피클 병을 던지면서, "어떻게 피클 뚜껑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냐"라고 울부짖는 장면이다.
<출처 - 유 퀴즈 온더 블럭 손예진 편>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심해진 왼쪽 어깨 통증 때문인지, 유책배우자인 전남편이 재산분할에 대한 말을 자꾸 바꿔서인지, 남편의 경제력이 내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내 지난날에 대한 후회 때문인지, 복직 후 육아와 일을 어떻게 감당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 이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이 조금씩 쌓여 내 감정 그릇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이미 내가 담을 수 있는 용량을 넘었지만,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딱 한 방울이 더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빠를 보고 온 아이에게 친정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아이가 피곤해서 그런지 우리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예정된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러니 부모님이 우리 집에 와주시겠다고 하셨다. 내심 기뻤다.
"금아,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대. 우리 같이 맛있는 저녁 먹자."
"싫어, 난 싫어. 할머니, 할아버지 보기 싫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벌써 출발하셨는데... 금이에게 주려고 편의점을 몇 군데나 돌아다니면서 구한 포켓몬빵(을 모시고)과 함께 오는 중이신데... 포켓몬빵과 외식 등 여러 가지 유인책으로 금이를 꼬셔보았다. 그래도 안 통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왜 보기 싫어?"
"이유는 없어. 그냥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나의 거듭된 설득에도 불구하고 금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떼를 썼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 너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 때가 있지."하고 이해하고 넘어가 줬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이거 하나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싶었다. 멀리서 금이와 나를 위해 오고 있는 우리 부모님을 보고 싶지 않다는 금이의 말이 나에게는 '열리지 않는 피클 뚜껑'이었던 셈이다.
부끄럽지만, 떼를 쓰는 아이 앞에서 나도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엄마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부끄럽다.. 나 왜 그랬을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진짜 가관이다..)는 말도 뱉은 것 같다. 너무 슬퍼서, 내 눈물의 무게가 감당이 안 되어서, 바닥이 나를 자꾸만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중력이 이렇게나 엄청난 것이었나. 나를 짓누르는 공기는 또 왜 이렇게 무거운가. 숨을 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그동안 나는 어떻게 이렇게 힘든 일을 매 순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모두 다 당연하지 않게 느껴졌다.
사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피클 뚜껑이 쉽게 열리는 것도, 손녀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즐겁게 맞이하는 일도, 어디 아픈 곳 하나 없는 몸 상태도, 싱글맘이 육아와 일을 다 잘하는 것도, 30대 중반에 걸맞은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는 것도, 전 배우자와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육 파트너로서 페어플레이를 하는 것도... 심지어 지금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중력과 공기 저항을 이겨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쉽고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그날 나를 무너뜨린 것은 금이의 떼가 아니라 '그 정도는 쉽게 될 줄 알았는데...'라는 내 욕심이자 착각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도착한 엄마가 이 광경을 보고 나를 꾸짖으셨다.
"혼자 애 키우고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가야 하니 힘든 것은 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른이 힘들다고 해도 이 작은 아이만큼 하겠니? 어른들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야. 지금 가장 혼란스럽고 힘든 것도 금이고. 금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 커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이 정도 일에도 무너지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래?"
엄마한테 실컷 혼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우리 딸한테 무슨 말을 한 건지... 왜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 후회와 자책이 몰려왔다. 나는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금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금이는 나에게 "실수해두 괜찮아"라고 적힌 <긍정말 선물 카드>를 주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난 엄마가 아무리 실수 많이 해도 엄마 좋아할 거야. 엄마, 우리 한 번 잘 살아보자!"
고마워, 엄마의 잘못을 실수라고 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