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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 Feb 26. 2023

졸업 후, 유럽의 시골마을에 가고 싶어졌다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


매미 울음소리로 귀가 얼얼했던 어느 여름날, 드디어 졸업을 했다.



나에게 졸업은 인생에 더 이상의 방학은 없다는 최종 통보와도 같아서 썩 반갑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날이 어찌나 더운지 애써 공들인 머리는 땀에 엉망이 되었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자꾸만 머리에서 학사모가 떨어져 버려 아쉬움, 먹먹함과 같은 감성에 빠질 겨를이 없었다.


반대로 불안함에 빠지기는 너무 쉬웠다.

졸업 후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주었고 그에 대한 나의 답례는 정해져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는 것.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당시 나는 어떤 계획도 목표도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계획이 없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나는 머릿속을 굴려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거대한 불안감에 녹초가 되곤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어느 카페에서 예린을 만났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다녔고 얼마 전 졸업까지 나란히 한 예린은 그 시기에 가장 편한 사람이었다. 함께 붙어 다녔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한 번도 서로의 계획을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계획’이라는 단어를 들어서였을까, 갑자기 예린이의 계획이 궁금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약간은 어색하게 예린에게 물었다.

“너는 이제 뭐 할 거야?”

예린은 곧바로 대답했다.

? 유럽 갈라고.


예린은 스무 살부터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까지 돈을 모아 매년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을 옆동네처럼 가깝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졸업을 하고 난 직후 또다시 한국을 나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실’, ‘사회’, ‘직업’이라는 세계에 휩싸여있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나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예린의 대답에 꽤나 놀랐다.


일은? 다들 회사 들어가잖아.

내가 생각해도 고리타분한 말에 예린이는 인상을 찡그린 채 말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일해서  이상 하고 싶지도 않아. 유럽에 다시 나가는  내가 미친 듯이 일했던 이유야, 이유.

“언제 나갈 건데?”

“아직 생각은 안 해봤는데. 여름은 너무 더우니까 한 9월쯤?”


나는 어릴 적부터 줄곧 일본에만 흥미가 있었던 터라 예린의 유럽여행이 그다지 부럽지는 않았다. 나에게 유럽은 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은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예린이가 유럽을 갈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사진들은 여행 프로그램에서 자주 봤던 관광지가 아닌 작은 도시나 시골의 풍경이었다.


“너 유럽 갔을 때마다 뭐 했어?”

“일했지. 우퍼로. 고등학교 때 기억 안 나?”


초여름의 강화도. 학교 주변은 온통 논으로 가득했다.

예린의 물음에 잊고 있었던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우리 학교에는 매년 외국인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캐나다, 프랑스, 싱가포르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그들을 ‘우퍼’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기숙사 옆 ‘게스트 하우스’라고 불리는 집에 머물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한 학기를 우리와 함께 보냈다.


우리가 수업을 듣는 동안 그들은 농사 선생님과 밭일을 하곤 했다. 흙을 갈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수확을 했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가 되면 우퍼 옆에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영어를 잘하는 애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참 동안 웃으며 대화를 나눴고 영어를 못하는 애는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축구를 하곤 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강화도 시골 마을에 있는 이 학교가 뭐가 좋아서 이 먼 곳까지 온 걸까 늘 궁금했지만 우리에게 그들은 그저 친구였다. 먼 나라에서 온 친구.


밭을 갈고 있는 열아홉의 예린

그렇다. 멀고 먼 나라에서 농사를 지었던 그들처럼 예린은 매년 유럽의 한 시골에서 일을 하고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럼 너 이번에도 우퍼로 지내다 올 거야?”

나의 물음에 예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럼 나도 갈래”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듯 예린은 재차 물었다. 내가 유럽에 흥미가 있지도, 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별로  끌리는데 유럽 시골은 가보고 싶어. 거기 시골은  다르게 생겼으려나.

그래? 그럼 가자. 너도  번쯤은 유럽 가봐야지.

예린은 활짝 웃으며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언제 갈지, 어디에 갈지.


그 사이 밖은 어두워졌고 끝날 기미가 안 보이던 우리의 대화는 카페 마감시간 덕에 간신히 끝을 맺을 수 있었다. 헤어지기 전 예린은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같이 유럽을 가다니! 네가 유럽을 가다니! 너 마음 바꾸면 안 된다?”


역 앞에서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정류장에서 집으로 갈 버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나에게 계획이 생겼다. 무언가가 정해졌다는 안도감과 가장 먼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에 속이 울렁울렁거렸다.


유럽을 간다. 그리고 다시 시골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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