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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Apr 26. 2022

그런 사람

생각 하나. 중심의 길


곧게 자란 저 나무처럼

우리도

두 팔을 나란히 펼친다면




 치우친다는 것은 반대 방향을 살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대 방향에 전혀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국 또 하나 살펴봐야 할 가치를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치는 사람들의 일부는 반대 방향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에 그런 것이고, 일부는 모든  가치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가치를 선택할 수는 없어도 ‘균형의 가치’를 선택하여 모든 가치를 지킬 수는 있습니다.


 모두에게 완벽한 한 점을 찾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결국 균형의 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균형은 어중간한 위치로 이동하는 것처럼  적당한 타협에 의한 절충점이기보다, 내 쪽에서 미처 못 보았던 - 완벽하진 않지만 - 탁월한 최적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좌표보다 어쩌면 더 합리적인 좌표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찾기 위해서는 반대편의 입장에 발을 한번 걸쳐보는 것을 넘어 그 입장으로 완전히 관점을 전환해서 사물을 차분히 바라본 후 자기의 위치로 되돌아올 필요도 있겠습니다.


 낮과 밤을 이어주는 선선하고 은은한 저녁은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둠이 조화하였으되, 낮의 현란함과 밤의 캄캄함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낮과 밤의 단순한 경계가 아니고,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하루의 한때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인이라는 오해와 비방을 받을지라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길이 바른길이 아니요, 균형을 잡고 가는 중용의 길이 바른길이라고 믿는다면, 그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꿈이 어우러진다

빗방울이 햇살에 빛나듯





생각 둘. 동(同)이 아닌 화(和)


잎새가 지니 보였네

나무들이 모두 한 하늘을 향하네

우리도 빈 가슴으로 만나면


 사람은 보통 자기의 잣대를 가지고 사물을 해석합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은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화를 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것은 의도적인 억지 주장이 아니라 자신의 잣대로 상황을 해석했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물을 재단하는 잣대가 근본적으로 다르고 타협의 여지가 없어 소통과 조정이 힘든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물을 재단하는 나의 잣대에 묻어 있는 자신을 향한 자만과 상대방을 향한 비하를 걷어내고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뜻밖에도 쉽게 소통과 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논어 <자로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화(和)하나 동(同)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同)하나 화(和)하지 않는다.”


 전자는 뚜렷한 주관으로 다른 사람과 비록 대립할 수는 있으나 건설적인 논쟁을 통해 도출된 방향이 자신의 주관과 다르다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고 기꺼이 협조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을 의미할 것이고, 후자는 분란을 피하고 상대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동조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을 일삼는 사람을 의미할 것입니다.


 겉으로 조화로운 모습이 제대로 된 소통은 아닐 것입니다.



햇볕 아래 저 숲길을 보라

함께 그늘을 만들지 않는가





생각 셋. 아름다운 단어


저 사람 정치적이야. 참 괜찮은 사람이야….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정치란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등의 역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적이라고 하면, 이런 본래의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 정치적이야.' 이라는 말을 들을 때, 정치의 사전적 의미처럼 그 사람이 집단의 이해를 잘 조정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고, 뭔가 권모술수를 잘 쓰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흔히 말하듯 줄을 잘 서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일 것입니다. 어쩌다가 정치라는 좋은 의미가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정치인을 떠올릴 때, 언론의 화려한 조명불 앞뿐만 아니라, 그의 고독한 집무실 책상 앞에서도, 이해득실과 술책을 궁리하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아닌, 나라의 먼 미래를 조망하며 묵묵히 연구하는 깊고 진중한 눈빛이 생각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저 사람 정치적이야.'라는 말이 저 사람은 그 사회의 화합을 도모하고 갈등을 해결하면서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다가올 수 있도록, 즉 정치라는 말이 그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그 단어의 주체인 정치인들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정치현장에 많이 투입될 수 있도록, 현란한 과대선전에도 끄떡하지 않고 참된 인물을 가려내는 것은 저와 같은 국민의 몫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신을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두 가지 중에서 어떤 의미의 '정치적'인 정치인인지를….





생각 넷. 가식의 옷을 입는 사람


 내면의 세계에서는 인간 비밀의 극점까지 엿보거나, 인간의 원초적 부끄러움을 감싼 옷을 훌훌 벗더라도, 외부의 세계에서는 절제된 외관을 유지하는 작가의 차라리 가식적인 모습이, 그 안을 보고도 사람들이 일부러 파헤치지 않는 비밀이나 인간의 본능적인 수치를 솔직의 미덕을 내세우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자신도 그렇게 닮아가며, 그것이 예술가의 참 모양, 용기 있는 모양인 것처럼 여기는 작가보다는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보였습니다.

 비밀을 가려야 한다면 가려내는, 비치는 비밀에 눈 감아야 한다면 눈을 감는… 어쩌면 그것이 사람입니다. 옷이 알몸을 감추는 어쩔 수 없는 가식이라면, 가식의 옷을 기꺼이 입는 것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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