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불신
아버지는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우리 집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큰 고모가 신실한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멀고 먼 서울에 계셔서 아버지의 관심 밖이었다. 아버지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비하했고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불신했다. 그렇다고 절에 다니지도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저 집안 어른들에게서 배운 예법에 따라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모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살던 집 바로 앞에 교회가 있었다. 걸어서 1분 거리였지만, 간식을 주는 부활절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때만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네에서 유일한 놀이터가 교회에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동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교회 놀이터로 모였다. 놀이터를 벗어나 예배당 근처로 뛰어다니면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상'처럼 생긴 관리 집사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우리를 쫓아냈다. 3년 전 아들과 함께 내가 자란 동네로 여행 갔을 때 살던 집은 없어졌지만 교회는 30여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사하면서 교회와 물리적으로 멀어졌지만, 과자 주는 날에는 여전히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다. 친구들이 바뀌면 교회도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내 삶에 하나님은 없었다. 믿음의 길을 열어준 분은 중학교 음악선생님이다. 음악선생님은 모태 신앙이었고 믿음이 신실했으며, 당시 남편 될 분의 직업이 목사였다. 음악선생님은 교내에서 점심시간 때 따로 시간을 내 학생들을 전도하며 음악실에서 짧은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반장이어서 여러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음악선생님은 특별히 나를 잘 돌봐주셨다. 늘 궁기가 있는 내 모습이 음악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음악선생님의 남편이 부목사로 섬기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믿음은 없었다. 다른 부류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음악선생님과 친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의 반대로 마음 놓고 교회를 다닐 수 없었다. 내가 다녔던 교회, 즉 음악선생님의 남편이 부목사로 있는 교회는 우리 집과 상당히 멀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1시간 정도 걸렸다. 나 혼자 집 근처 교회를 알아보고 등록할 용기도, 믿음도 없었다.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도 반대하는 마당에 자연스럽게 교회를 자주 빠졌다. 고등학교를 다른 동네로 진학하면서 음악선생님과 멀어졌다. 음악선생님은 나의 신앙생활이 걱정됐는지 매주 토요일 오후 남편이 이끄는 영어 성경 공부 모임에 나를 넣었다. 그 모임은 음악선생님 가족이 미국으로 유학 가면서 오래 가지 못했다. 이때부터 믿음의 홀로서기가 시작됐고, 교회는 가고 싶을 때만 갔다. 특이하게도 남들 앞에서 "교회 다닌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어려운 형편을 가려주고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생각했다.
거미줄처럼 아슬아슬한 믿음을 이어가던 나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사람을 보내주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각별한 돌봄으로 얼마간 꾸준히 교회를 다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선생님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의 아들은 중학교 때 음악선생님과 함께 점심 예배를 이끌었던 같은 중학교 1년 후배였다. 그 후배는 수재로 이미 교내에서 유명했고 음악선생님을 연결고리로 나와도 친분이 있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 친구의 아버지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 선생님은 고등학교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 때 한 번씩 우리 학교로 찾아와 간식을 주시고 기도를 해주셨다.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귀하신 분이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믿음의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돌봐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졌고, 몇 차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믿음이 성장했다. 방학 때 본가에 내려가면 보이는 곳에 성경책을 꺼내 놓을 수 있었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다녀오겠다"라고 인사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거기는 뭐하러 가느냐"고만할 뿐 말리지 않으셨다. 나중에는 이 말씀도 안 하셨다. 사기꾼에게 당하지 않을 만큼 내가 성장했고, 그만큼 자식에 대한 믿음도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를 전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임종도 못 지켰다. 생전에는 지레 겁을 먹고 아버지에게 "교회 한 번 나가보세요"라고 말을 건네지 못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그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직접 모시고 교회에 가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끝내 아버지를 전도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홀로 외롭게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라도 아버지의 묘비에 십자가를 걸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