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작품, 눈길 한번 주시고 처리해주세요. 애들이 '우리 엄마는 그냥 버려요'라고 얘기하며 자기 작품에 애착과 정성을 들이지 않습니다."
수업 알림장인 '클래스팅'에 담임선생님이 글을 올렸다.
잠시 뒤 학부모 단톡방에서 같은 감정이 공유됐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버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눈길은 애착과 정성으로 이어진다. 선생님이 깨달음을 주셨다.
"이거 거실에 좀 걸어줘. 만든다고 힘들었어."
며칠 뒤 아들이 갖고 온 작품을 휑한 거실 벽에 걸었다. 애초에 거실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는 게 없었다. 좋은 그림을 사서 걸어놓겠노라 했지만 수년째 빈 벽이다.
아들의 작품이 첫 작품이 됐다. 아들에게 고마웠다.
아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첫 번째 집에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됐다.
최근에 읽은 도서 '이순신의 바다'(지은이 황현필)에서 뜻 밖에 '나의 작품'을 발견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 그렸던 그림을 3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미술 교육에 각별했다. 특히 점심시간 때는 도시락을 먹은 뒤 다 같이 크로키를 했다. 반드시 크로키 1장을 완성해야 운동장에 나가 놀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크로키를 그렸다. 모델로 발탁된 아이는 그날 운동장 구경을 못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은 정규 수업을 마친 뒤 따로 교실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 주로 정물화를 그렸는데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나는 교실에 남아 그림 그릴 일이 없었는데, 딱 한번 선생님에게 큰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콜라주처럼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오려 캔버스 중앙에 붙이고, 그 사진과 이어지는 그림을 상상해 그리는 수업이었다. 그때 내가 사용했던 이미지가 이순신 십경도 중 '명량대첩'이었다. '이순신의 바다'를 읽으면서 이 그림의 내용을 알았다. 그 당시 내가 아는 이순신의 전투는 '한산도대첩'과 '노량해전' 밖에 없었다. 6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독립기념관을 찍고 현충사도 갔지만 명량해전은 기억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그린 부분이 명량대첩 사진 원본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색감과 분위기를 잘 연출했다는 것이다. 공부로 따지면 1등 한 셈이다. 선생님은 장학사, 교장선생님, 부모 참관 수업에서 이 그림을 다시 그리자고 했다. 첫 작품만큼 잘 그리진 못했지만, 이 그림을 처음 본 분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명량대첩은 한동안 우리 집에 있었지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애초에 관심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아 마음의 상처도 없었다. 다들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바빴고 지쳤다. 어릴 때부터 그게 일상이었고 크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의 작품에 그냥 스스로 뿌듯했던 것 같다.
'이순신의 바다'.
이순신 장군은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아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다.
황현필 작가는 지금까지 나온 이순신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책이라고 소개했다. 아들에게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 노량해전을 읽어줬는데 무척 좋아했다.
원균이 이끌어 조선 수군이 대패했던 칠천량 해전은 읽지 말라고 했다. 왜군에게 진 전투는 슬퍼서 알고 싶지 않단다. 노량해전을 읽을 때는 나도 아이도 가슴이 울컥했다.
각종 그림과 사진, 이미지가 당시의 상황을 영화처럼 떠올릴 수 있게 잘 안내해준다. 세계 해전사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잘 나와있다. 그저 자랑스럽다.
한 때 아들은 광화문광장에 우뚝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순신 장군을 본 뒤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이순신 장군 전시물을 관람하는 것이 순서였다. 어느새 이순신 장군 책을 읽을 만큼 아들이 컸다. 아들 덕분에 잊고 있었던 나를 종종 되찾게 된다.
이순신 장군 십경도 명량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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