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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낱낱 Aug 18. 2024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

'남해소년' 10화

"외근이건 내근이건 직장인인 건 맞잖아."


"아 몰라, 그 어제 얘기한 거 편집 끝났어?"


"아, 네. 거의 다 되어갑니다."


"왜 이렇게 여유롭죠? 길은유 씨. 내가 빨리해 달라고 그렇게 얘길 했건만요!"


"아, 아무리 바빠도 대충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고요, 누구 일인데 제가 게을리 할리가 있겠습니까!"


"빨리 주세요! 진정한 프로는 완벽하고, 빠르게! 몰라요? 오래 걸려서 잘하는 거, 르지만 대충 하는 거는 아마추어죠!"


"아무렴요~~ 네네."


괜스레 맞받아치는 은유의 말을 막기 위해 딴 소리를 시전 했다. 진행 중인 다음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콘텐츠를 편집 중이던 은유는 능청스럽게 대답하면서 내가 준 선물을 뜯어 젖혔다. 생각지 못한 레깅스가 툭 튀어나오자 어쩔 줄 몰라했다. 여태 레깅스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정작 본인이 필요했던 걸 받아 들자 말문이 막혔는지 갑자기 어투가 부드러워졌다.


"역시 레깅스가 최고지요, 임수빈 팀장님!"


"회사에서 입으라고 산 건 아니니까 그 파자마 대신 레깅스 입고 다니면 안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은유로 인해 나에게 반짝이는 햇살만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뱃살도 함께 늘어갔다. 만났다 하면 먹고 마시고 취하고, 살이 안 찌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싶을 정도였다. 은유가 낮에 들이민 레깅스 입은 내 모습은 과거 소셜앱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장면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내가 그나마 멀쩡했던 리즈시절을 들춰낸 은유가 얄밉기도 하면서 은근 짜증이 밀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은유는 늘 통통해진 나를 두고 단 한 번도 외모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게 다 좋다고 했다. 어떻게 된다고 해도 다 좋단다. 갑자기 너무 이뻐진 수빈이가 연예인이 된다고 해도, 계속 뚱뚱해져서 수빈이가 방구석에서 굴러다니기만 한다고 해도 은유는 괜찮다고 했다.


본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겐 내 살들도 나의 본질이다. 본질이 변하면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는 걸 경험상으로 인지하고 있기에 나태함은 나의 최대 적이라며 늘 싸워서 이겨온 사람이 바로 나 임수빈이다.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내일부터 다이어트다! 잘 됐다. 출장도 가게 되었으니 은유를 만나서 먹고 마실 일은 일단 차단되었겠다 이참에 나도 피티도 좀 끊고 바프도 좀 찍고 해 봐야겠다는 욕심이 밀려들었다. 과거 사진앱 상태로 돌아가서 나의 본질이 뭔지를 다시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다.


"자, 이제 먹자."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니까."


"일단 먹고 보자."


그렇게 닭다리를 손에 들고 짠을 하려는데 휴대전화 메시지가 울렸다. 태한의 메시지였다. 메시지 안에는 이제 퇴근한다는 인사와 함께 내일 순천행 예매표가 함께 들어있었다. 두 개의 닭다리를 은유와 함께 들고서는 크로스한 후, 복날 인증숏을 찍어 그의 인사에 답했다.






아이스크림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내 긴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갑자기 듣게 된 날벼락같은 소식에 나의 무모함을 탓할 뿐, 누구를 원망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원래로 다 돌아간 것이 다행이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록 깊게 남아있는 찜찜함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의 이번 탐험 혹은 추리극은 여기 이렇게 바닥을 드러낸 아이스크림 통과 같이 끝이 나는구나 했다.


순간 선화의 휴대전화가 테이블 위에 깔린 통유리를 울리며 달그락거렸다. 액정 화면이 밝아지며 다름 아닌 그의 오빠 남우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바닥을 드러낸 아이스크림 통을 둘러싼 우리 셋의 눈동자는 다시 긴장감으로 채워졌다.


"오빠가 할 말이 있데요."


"예? 누구? 누구한테?"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설마 통화를 나랑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의심 반 기대 반하면서 나의 손에는 그녀의 휴대폰이 쥐어졌다.


"여,, 보세요..."


"서울에는 언제 올라오죠?"


"한번 봐야  것 같은데..."


나는 무슨 대답을 할지 몰랐다. 만나는 게 맞는지 아닌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나는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그 팔찌의 주인을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날 나에게 그 팔찌를 준 소녀를 만나고 싶었어요'


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정말 만나고 싶은 이유가 뭔데요?'라는 질문을 내가 던져야 했는데, 끝내 그 말이 내 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반대로 과연 그를 왜 만나야 하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주인을 찾았다는 선화의 말에 그와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을뿐더러 지금 당장 창피해서 숨고만 싶었다. 물론 한편에는 직접 만나서 내 목소리로 사실대로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결코 그의 기억 속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 서울에 올라가면 연락을 드릴게요."


"제 연락처는 동생한테 전달받으시고요, 그럼 나중에 뵙죠."


그의 짧은 인사로 끝을 맺은 후 선화는 내 휴대전화를 들고는 오빠의 번호를 꾹꾹 눌러 입력하고 이름 석 자를 빠르게 두드려 넣었다. '연남우' 그렇게 그의 이름이 내 연락처에 저장되었다.


바로 서울로 올라오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명희네 집에서 하루 신세를 져야 했다. 밤이 깊어져 가는데도 열대야 현상인지 읍내 거리는 후덥지근했다. 읍내에 있는 명희네 집보다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고 잠을 청하고 싶었다. 마침, 명희네 할머니는 아직 다랭이 마을에 살고 계셔서 우리는 먹을 것을 좀 챙겨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더위는 한층 사라졌지만 습한 바람과 짭조름함이 피곤함과 겹치면서 찌뿌둥함으로 온몸에 파고들어 왔다.


명희네 할머니를 보니 옛날 어린 시절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들었다. 외할머니는 계속 이곳에 사시다가 혼자 식사 챙겨 드시기도 어려울 정도가 돼서야 천안에 있는 엄마 집으로 올라오셨다. 그러고는 한두 달 함께 지내시다가는 유명을 달리하셨다. 엄마 집에 계실 때도 나는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못 가 뵈었다.


내겐 이곳 남해에서 불 지피고 계셨던 할머니의 등 굽은 모습이 마지막 기억으로 아련히 남아있다. 명희네 할머니와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잠시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나 보다. 그 둘은 나를 겨우 질질 끌고 들어와 방안에 간신히 눕혔다고 했다.


다음 날 눈을 뜨니 무언가가 나를 깔고 앉은 듯, 온몸이 움직이지도 않고 근육이 뻣뻣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냥 계속 누워 있었다. 왜 아픈 건지 모르겠지만 온몸이 아팠다. 그 와중에도 항구에 나가 새벽일을 마치고 돌아온 강철 체력의 명희는 나를 흔들어 깨웠지만 눈만 동그랗게 뜨고 일어나진 못했다. 약을 좀 사 와야겠다며 차를 끌고 읍내로 나간 명희를 대신해, 명희네 할머니께서 삼각형으로 썬 수박을 은쟁반에 가지런히 담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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