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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낱낱 Aug 16. 2024

레깅스와 파자마

'남해소년' 9화

회의가 끝나고 은유는 우리 둘의 손을 잡아끌고는 굳이 당장 로또를 사야 한다며 복권방으로 데려갔다. 일곱 개의 번호를 각자 적당히 조합하여  다 칠해진 용지  장을 주인장에게 건네며 만오천 원을 은유가 모두 계산하려내가 막아서며 말했다.


"아니 아니, 이건 각자 해야죠. 혹시라도 당첨되면 시비가 생길 우려가 있거든요"


"아, 이거 제가 억지로 데려왔는데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요"


"아니에요. 이게 당첨되면 또 사람 마음이 달라지거든요. 아예 그런 소지는 남기지 맙시다 우리!"


"하하, 뭐 그러시다면야."


결국 각자 계산하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은유와 태한은 각각 만원 짜리, 오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있었다. 한데 내 카드지갑에는 카드만 있고 현금이 없었다. 비상금으로 만원 짜리 한 장을 고이 접어서 넣고 다녔는데 언제 써버렸는지 이게 없었다.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하, 이럴 거면 그냥 사준다 할 때 조용히 잠자코 있을걸 또 괜히 나댄 나 자신이 싫어졌다. 그런 나를 곁눈질로 알아본 은유는 재빨리 만오천 원으로 세 장의 복권을 계산했다. 그중 한 장이 내 손에도 쥐어졌다.


은유와 나는 삼 년 전 이렇게 처음 만났다. 몇 번의 업무미팅과 저녁식사, 그리고 회식자리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묘하게 빚을 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은유에게 몇 번의 빚이 쌓이고 또 갚기도 하고, 이를 반복하면서 빈틈없던 철벽녀 나 임수빈의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틈이 있어야 빛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그로 인해 나에게 작은 햇살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






한낮의 햇살은 아스팔트를 달궈 도시의 기온을 뜨겁게 올리고 있었다. 건물들에서 뿜어대는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가 골목길 그늘마저 후끈하게 데워서 피할 곳이라곤 한 곳 밖에 없었다. 한기마저 흐르던 뷰티숍 매장에서 20분 넘게 기다린 끝에 은유가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후끈한 열기와 습기가 다시 온몸을 감쌌다. 열 발자국만 넘게 걸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힐 것 같았다. 찝찝한 날씨에 기분도 꿀꿀하고 불쾌지수가 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그래도 출장 가기 전에 몸보신하라며 복날구실로 삼계탕을 쏘겠다는 은유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줄지어 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당에 대기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자 이마에 맺혔던 땀은 멈추지 않고 목덜미와 등짝까지 흘러 나의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했다.


은유는 조금 기다려 볼까 했지만 나는 일절의 망설임 없이 근처 닭집들을 검색했다. 굳이 줄을 서면서 까지 먹어보겠다는 중복날의 삼계탕은 그냥 평상시에 편하게 먹는 게 훨씬 더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최대한 멀지 않은 곳의 치킨집을 찾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치맥 하는 편이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해 줄 것 같았다.


"오늘 오전에 대명그룹 건 최종 시사를 했거든, 임원들도 많이 앉아있긴 했지만 별 얘기 없더라고"


"그렇지, 대부분 회장 한 마디에 왔다 갔다 하지"


"응 맞아. 마지막에 대빵이 한 마디 하더라고, 뭐 괜찮긴 한데, 중간에 임팩트가 좀 부족하다나"


"어제도 마무리하느라 거의  밤샌 거 아니야?"


"맞아. 정신이 하나도 없네. 임팩트라..."


오늘도 피티를 무사히 마쳤다. 사실 무사히 까지는 아니고, 나머지 마무리가 남아있긴 하다. 실무자들끼리 아무리 잘 통해도 결국은 제일 윗선에서 나오는 한 마디 말에 모두가 휘청거리기 일쑤인 이 바닥에서 오늘 정도면 무사하다고 칭할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내일 순천 내려가는 거야?"


"응, 벌써 일주일 금세 지나갔네."


"언제 올라오는데?"


공식적으로는 이틀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흘이었음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시현과 함께 답사를 다녀온다는 얘기로 은유를 안심시켰다. 굳이 감출 것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설명할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던 차였고, 여태껏 그 어릴 적 망상 같은 얘기는 은유에게 한 적도 없었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냉철하고 딱 부러지고 현실적인 프로페셔널리스트다. 그런 감상적인 얘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나 스스로 만든 선입견이 있기도 했다.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다시 재취업을 하게 된 은유에게 떠나기 전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다름 아닌 레깅스였다. 요즘 생활패턴이 바뀌다 보니 몸이 찌뿌둥하고 머리도 아프다는 둥 엄살을 부려댔다. 운동하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그는 갑자기 요가를 한답시고 요가복이 필요하다며 졸라대던 게 문득 생각났었다. 그래서 거래처에서 최근 새로 론칭한 자연소재로 만든 남성용 레깅스를 미리 사두었다. 근데 마침 퇴근 후 은유의 옷차림은 뭔가 정갈하지 않아 보여 한 마디가 불쑥 나왔다.


"아니, 그건 무슨 바지야? 잠옷 아니냐고!"


"뭔 소리야! 이게 요즘 MZ 스타~일이라고요!"


"그러세요? 스타일, 참 독특하세요."


"뭐가 어때서 요즘 나도 맨날 야근하느라 밤낮이 바뀌어서 사실 편한 옷 찾다 보니까 이게 제일 편해, 밴딩 바지인데 파자마 스타일이야. 한 번 입어볼래?"


"됐네요.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아니 직장인 복장이 아니지 않아?"


"직장인이 일만 잘하면 되지, 일을 잘하려면 마음도 몸도 편해야 하지, 그러려면 옷, 신발, 걸치고 있는 것들이 편해야겠지? 그게 바로 직장인의 근본이지!"


"직장인에게는 편안함도 중요하겠지만 긴장감도 중요하답니다요. 길. 은. 유. 씨!"


뭐든 딴지 걸고 보는 내 성격이긴 하지만 나는 늘 정말 맞는 말만 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아무리 편한 게 좋대도 어느 정도 긴장감이 있어야 일이 잘 된다고 믿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자기도 레깅스 입고 출근할 때 있더구먼~뭐!"


"내가 언제? 뭔 소리야! 모든 것은 예외가 있는 거야. 그때는 외근이었다고 이 양반아~!"


그는 소셜앱을 뒤적이며 나의 옛날 사진을 들춰서 들이밀었다. 이건 출사 갈 때니깐 편한 복장이 필요했던 거라고 핑계 아닌 해명을 했다. 게다가 레깅스만큼 편한 옷은 세상에 없을 거라며 추종하던 시기였음을 또한 어필했다. 그러면서 또한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아마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입을 삐죽거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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