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이 마련해 준 김포행 비행기표 때문에 태한이 미리 예약해 주었던 용산행 KTX 기차표는 취소를 해야 했다. 어차피 남해에 온 이상 순천역까지 돌아갈 일은 없어진 상태였다. 사천공항 활주로를 이륙하여 구름 속을 지나고 있는 창 밖 풍경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작은 유리창에 반사된 나의 긴 속눈썹이 유난히 더 쳐져 보였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을 못 보고 올라가는 허탈함 보다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된 타격감이 더 컸다.
정말 팔찌의 주인을 찾았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이렇게 내가 찾아다니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의미가 없어졌다. 그저 올라가서 처리해야 될 일들만 많아지게 만든 시현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괜히 시현을 만나 가지고, 괜히 순천 프로젝트에 합류해 가지고, 괜히 명희에게 찾아보라고 난리를 쳐가지고. 사실 나의 경솔함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였다. 그냥 모르고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절실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올라오면 연락해 우리 홍보물에 넣을 사진이랑 영상을 좀 골라야 해.'
'오늘? 지금? 나우?'
'응, 시간이 촉박해서 내일은 또 자료 취합해서 넘겨야 하고, 할 게 많네'
'올라오는 대로 우리 회사로 와, 맛있는 커피 준비해 놓을게'
'어, 그래...'
역시 나보다 한 수 위, 발 빠른 시현의 메시지다. 시현은 역시 급해. 가자 마자 또 회의라니 비행 중에라도 잠시 눈을 붙여두는 게 좋겠다 싶어 창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인사하세요, 이 친구는 길은유. 편집해 줄 사람이고 프리랜서예요. 저랑은 잘 아는 사이고요."
태한은 함께 일해본 적이 있는 친구를 이번 프로젝트에 함께할 거라며 내게 소개했다.
"사진을 너무 잘 찍으셔서, 고르기가 힘들겠어요!"
보자마자 칭찬부터 던지는 그는 생글생글 잘 웃는 미소를 장착하고 눈밑으로 두터운 애교 살도 갖춘 사교성 넘치는 동글동글한 남자였다. 워낙 까칠한 사람들하고만 일을 해와서 그런가 다소 낯설기도 하면서 왠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일단 안심이 되었다.
"음, 몇 컷이나 쓸 거죠?"
"빨리 골라봅시다"
사진을 뒤적이는 둘에게 재촉하듯 모니터 화면 속 사진 목록을 넘겨가며 체크했다. 사진들에 일련번호를 매겨놓고 원하는 사진들만 골라 새 폴더에 따로 복사해 둔 뒤 폴더를 공유했다. 그렇게 1차로 걸러진 사진들 중에서 괜찮은 사진들 번호를 골라 보기로 하고 각자 노트북을 펼쳐놓고 흩어졌다. 태한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러 복도로 나갔고, 은유라는 편집자는 한쪽 구석에 놓인 커피머신에 넣을 캡슐커피를 고르고 있었다.
외근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의로 이어진 나는 피로가 밀려올타이밍이었다. 빨리 끝내고 오늘은 집에서 샴페인 한 잔 하고 자는 것으로 굳어버린 몸과 마음을 풀어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집중해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살표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 옆으로 은유가 내려온 커피 향이 스며들어왔다. 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맙다는 말 대신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는 척하고는 내려놨다.
"고향이 남해라던데요? 태한이 말로는"
"몇 살에 올라왔어요?"
"사투리를 전혀 안 쓰시네요?"
연이은은유의 질문에 여전히 나는 키보드만 두드리며 짧게 대답했다. 남해 맞고, 초 6에 전학 왔고, 이십 년 가까이 서울 살다 보니 사투리는 다 잊어버렸다고. 최대한 싱겁고 건조하게,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습관처럼 애를 썼다. 그래도 앞으로 더 볼 일이 있을 것 같아, 예를 갖춰 형식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줬다.
"어디세요 고향이? 서울?"
"아뇨, 저는 하동이에요, 하동 아시죠? 섬진강, 재첩국 그리고 십리 벚꽃길."
"아~ 하동."
"사람들이 하동 하면 이름은 알지만 어디 있는지 잘 모르더라고요"
"아~ 네."
"섬진강 줄기가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를 가르며 길게 뻗어있죠.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하동이 있어요."
"강줄기가 참 예쁘고 드라이브하기 딱 좋거든요~"
"아~ 드라이브."
사실은 나도 하동에 대해서 웬만큼 잘 아는 편이었다. 이곳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는 바빠서 접어뒀지만 워낙 전국 각지 안 다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했었고, 하동은 내가 좋아하는 봄 여행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기도 했다. 모두가 다 알게 되어서 유명해지고 복잡해지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은 그런 곳이다. 그냥 나 혼자만 알고 있으면 충분한 히든 플레이스. 이미 유명해질 만큼 유명해진 쌍계사 십리 벚꽃길 정도는 모두에게 양보할 의향이 있기는 하다.
천진난만하고 해맑게 자랑하는 이 친구의 입을 막고 빨리 일이나 끝내고 집에 가자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관심 있는 척 응대해 주면 이야기 바다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아 그에 도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남해 자랑할 게 산더미 같이 많고,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걸 좋아라 하지만, 오늘따라 계속된 회의에 몸도 마음도 미역줄기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다들 골랐네? 어디 한 번 모아서 볼까요?"
태한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 매겨진 번호들을 취합해서 정리를 했다. 각자 5개씩 픽했으니 아마도 15개 정도, 중복되는 것도 있을 테니 10개 내외로 정리가 될 것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중복되는 것들을 포함해서 7개였다. 세 명이 골랐는데 7개라면 중복된 것이 네다섯 개 정도 된다는 것인데. 역시 사람 보는 눈이 비슷한가 보다 했다.
"신기하네, 어쩜 딱 일곱 개가 선택됐네요!"
태한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사진들을 추려서 한눈에 보이도록 했다.
"그러게요. 3, 11, 22, 34, 39, 41, 44 이렇게 되네요. 혹시 몇 번 고르신 거예요? 수빈 님은?"
사진은 안 보고 숫자에 집착한 은유가 내게 물어왔다.
내가 대답은 안 하고 쭈뼛거리고 있자, 은유가 먼저 자기가 고른 번호를 말했다. 신기한 건 내가 고른 사진의 번호와 그가 고른 사진의 번호가 모두 일치했다. 그렇다면 태한도 3개는 일치하고, 2개는 다른 걸 골랐다는 뜻이란 걸 빠르게 간파했다. 나는 행여나 태한이 고른 2개의 다른 사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피하고자 본능적으로 말을 돌렸다.
"아, 이거 일곱 개 숫자가 심상치가 않네, 로또 번호 같아~"
"그래 그래, 적어 적어. 있다 집에 갈 때 사야겠다"
은유가 입을 오므려 힘을 주고는 번호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포스트잇에 적었다. 나는 그 번호들이 적힌 포스트잇을 끌어와 카메라앱으로 찍어 나의 핸드폰에 저장했다. 태한은 그 걸 보고는 자기한테 톡으로 보내달랜다. 역시 효율성 갑은 태한 차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