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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낱낱 Aug 11. 2024

순천만 칠면초

'남해소년' 6화

매표소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개찰구를 통과할 때부터 두근두근 떨렸고, 플랫폼을 찾아서 객차 번호와 방향에 맞게 서있는지도 몇 번씩 확인해야 했다. 객실 중앙 통로를 걸어가면서 하나하나 좌석 번호를 확인할 때도 어떤 사람이 옆에 앉을 것인지 불안을 삼켰었으며, 중간중간 지나가는 검표원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지은 죄도 없는데 표를 꼭 쥐고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했다. 거의 내릴 때쯤에는 땀에 젖은 기차표 때문에 혹시라도 나갈 때 잡히는 거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던 어린 날의 편린이 아직도 떠나질 못하고 뇌리에 남아있다.


지금도 확신 없이 무언가 판단하고 결정할 때 혼자인 것은 늘 불안을 가져온다. 그래서 더 집중한다. 한 번 더 확인하고, 혹시나 하는 만약의 경우도 생각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선택해 주거나 책임져주지 않는다. 행여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누가 내신 그 길을 걸어가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하려면 항상 준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런 빠짐없이 확인하려는 습관만이 나의 안정을 가져오는 유일한 방법이다. 단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만 불편해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지금의 답사는 홀로 떠나기에 그런지 신경 쓸 주변인도 없고, 마음이 평안하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래된 노래' 목록을 열었다. 스치는 창밖으로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아산역 정거장 현판이 스치듯 지나가고, 이후로는 아무런 접촉이나 잡음 없이 뮤직 앱 저장 목록 마흔다섯 곡이 끝날 때 즈음이나 돼서야 순천역을 알리는 방송에 눈꺼풀을 열었다.


생각보다 업무 일정은 일찌감치 마쳤다. 아니 서둘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어서였다.


'어딜 가려고?'


'응, 있어 순천 뷰 맛집'


주차장에서 나를 픽업하려고 기다리던 시현은 옆자리에 앉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배고픈데, 밥부터 먹으면 안 되는 거지?"


"아냐 안돼, 지금 아니면 못 봐 못 봐!"


"구름이 살짝 껴서 불안하긴 한데"


"알겠다 알겠어, 주소 찍어봐"


지도 앱에서 위치를 찍어놓고는 내 목소리로 인간 내비게이션을 자처했다. 운전하는 시현이 지도 보는 시간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갈대가 우거진 사이로 길게 뻗어있는 데크 위를 걸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갈대밭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우리가 걷고 있는 발아래는 바로 갯벌이다. 걷고 걸어도 끝이 없이 펼쳐진 갈대숲 저 멀리에 언덕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누가 봐도 전망대 오르는 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기야 저기"


"갯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


"근데, 길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네, 여기가 강인지 바다인지 모르겠다."


전망대와 우리 사이에는 거대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을 강 건너라고 해야 될지, 바다 건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갈대밭을 일단 빠져나가야 했다. 갈대를 등지고 사진을 찍고 있는 커플에게 다가가 전망대 오르는 길을 물었다. 갈대밭 끝자락을 지나 한참을 걸어야 했다. 숨이 가쁠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올라 언덕을 넘어서자 서서히 너른 바다를 내보여주었다. 우리가 좀 전까지 있었던 갈대숲이 저 멀리 내려다보였다. 하늘은 붉은빛으로 시작해서 푸른빛까지 물들었고, 바닷가 특유의 구름들이 먼바다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반쯤 걸치고 흘렀다.


"우와, 저 하늘 좀 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저 갯벌 위에 동글동글한 아이들은 뭐야?"


아래로는 마치 누군가 그려놓은 것처럼 다양한 크기의 동그란 원 여럿이 붙어 있는 붉은색 섬들이 펼쳐져 있었다. 염분이 쌓여 섬을 만들어 마치 거대한 가시연잎이 둥둥 떠있는 것 같은 자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위에 일곱 가지 색으로 변한다는 칠면초가 자라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바깥쪽으로는 용이 지나간 듯 굽이굽이 흐르는 샛강이 물길을 터주고, 한 척의 어선이 퇴근길에 포말을 일으키며 기다란 물띠를 남기고 지나간다.


"그거 알아? 옛날 어부들은 너른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 생기는 물자국을 봤다고 하더라"


"아, 그렇겠네, 앞은 어차피 수평선 밖에 보이는 게 없을 테니"


"그렇지, 뒤를 돌아보면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를 알 수 있다는 거지"


난간을 붙들고 멀어져 가는 고깃배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노을 지는 바닷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허우적대는 와중에 문득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현의 말 한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는 시간 위를 흘러 서서히 사라지는 물자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천에서 이틀째 출장일을 마치고 나는 남해로 갈 참이었다. 사실 내려오기 전에 명희에게 전화로 부탁을 해두었었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체력이 좋던 명희는 국가대표 배구 선수로 발탁되어 유망 받는 아이가 되었는데, 잦은 어깨 부상으로 결국 고향에 내려와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가 벌써 오육 년 되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라 낙담이 뭔지 모르는 아이였는지라 남해에 내려와서도 금세 적응하고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아 해산물 도매상으로 자리 잡았다. 500년 역사를 지닌 남해 지족의 자랑 죽방렴 멸치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의 가판에는 그녀의 멸치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젊은 사람이 몇 없는 시골 마을에 힘쓰는 일이 많은데, 남자 못지않은 그녀였기에 여기저기 찾는 곳이 많은 유명인이기도 했다.


"있잖아 내가 찾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너라면 아마 찾을 수 있을지도..."


"아니, 너만이 찾을 수 있어!"


오히려 강한 어투로 압박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명희는 책임감을 심어주면 더 잘할 거니까. 선의의 채찍질을 통해서라도 나는 꼭 찾아내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말이 나왔다.


"근데, 이름도 모르고, 어데 사는지도 모르는데 어째 찾겠노?"


그렇지 않다. 분명한 건 우리와 동갑내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두 살쯤 위일 것이다. 사는 곳은 그곳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연고가 분명 있을 테고, 남자 형제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소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름 분석한 결과를 늘어놓았다.


"일단 아는 사람들부터 서치를 좀 해봐"


"너 중학교 때부터 배구부었잖아"


왠지 운동부 하면 선후배 관계가 그래도 좀 더 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 배구부?"


"그때, 마 중학생 때 배구부에 내 혼자만 여자였던 거 아나?"


"그래 바로 그거거든"


나는 남자들의 세계였던 배구부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명희가 분명 희망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 이제 그 당시 배구부 친구들, 오빠들 죄다 연락해 봐, 어렸을 때 다랭이마을에서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만난 적 없냐고, 그때 비즈팔찌 건네준 오빠를 한 소녀가 애타게 찾고 있다고!"


"비즈팔찌는 또 뭔디, 이 가스나야"


흥분하면 사투리가 강해지는 명희는 처음 나의 이런 얘기를 듣고 어처구니없어했다.


"있어 그런 게, 얘기하자면 길고, 일단 찾아봐! 알았지?"


"참, 그리고 이건 너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야 앞으로, 영원히, 쭈욱~"


"으이구, 알긋다. 내가 몬 산다. 니 땜시"


"고마워, 나 내일 내려가니까 그전에 싹 다 연락해 봐"


"뭐시?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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