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은 마치 이 동네 토박이처럼 나를 이끌어 고가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옆 건물 11층에 있는 브런치 카페로 자연스럽게 인도했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인데도 나는 처음 와보는 곳이라 신기했다. 워낙 점심 끼니를 대충 때우고 넘기는 편이라 이런 곳에 올 일도 없었다. 스카이 뷰가 어떻든 나는 오로지 팔찌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늘 만남의 9할 이상의 목적은 바로 그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1할은 순천만 프로젝트에 대한 짤막한 공유 정도였다.
"사실, 할 얘기가 있긴 했는데"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들이 오가고 난 후, 깨작깨작 샐러드를 포크로 건져 한 조각씩 입에 넣던 것을 멈춘 시현은 나보다 선수를 쳐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번 박람회 관련해서 홍보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콘텐츠들을 좀 네가 맡아주면 안 될까 해서"
"다른 건 다 섭외가 끝나가는데 이 부분만 결정을 못 한 상태라"
"어때? 요즘 다른 일로 바쁠까?"
예상치 못한 제안은 당황스러움을 일으키며 나의 뇌를 정지시켰다. '당연히 솔깃한 내용이긴 하다만 지금 할 일도 태산이거든, 친구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바쁘긴 한데, 네 부탁이라면 당연히 내가 안 할 수 없지!"
내심과 다르게 겉으로는 매우 호의적인 업무 모드의 말투로 내뱉었다.
한 번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또 과다한 자만감이 나를 앞에서 잡아당겼다. 나의 성급한 의지에 이끌려 일을 또 하나 늘리는 순간이었다. 시현은 뭔가 큰 걱정거리가 해소된 듯 먹다 말은 페이스트리와 내가 시킨 샐러드 볼 안에 있던 감자 크로켓까지 깨끗이 해치웠다.
"그럼 나도 부탁 좀 하자!"
"뭔데, 뭔데? 다 얘기해 봐"
나의 당당한 부탁의 말에 시현은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고 오히려 반갑게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팔찌뿐만 아니라 그날의 정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물론 그 팔찌가 원래 한 쌍이었던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현은 소라 사건이 있었던 그날 자체를 기억도 못 하는 눈치였다.
"아, 아, 그래 그랬었지. 기억난다 얘!"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 같은데 기억나는 척해 주는 게 귀엽다. 아무튼 나의 장황한 비밀 얘기를 들어준 시현의 손바닥 위에 희주의 잃어버린 팔찌를 넘겼다.
"내가 꼭 전해줄게"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다 같이 만나자"
나도 그러고 싶다만 아무래도 시간의 경과가 필요했다. 서운함이 누그러들고 어색함이 경감될 시간 말이다. 그리고 나면 같이 만나는 게 가능할 것 같다. 희주 성격이라면 쿨하게 다 받아 주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가 오길 기약하며 점심값을 계산하고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뭔가 팔목 한쪽에 묶여 있던 무거운 덤벨 하나를 내던진 기분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고 느낀 건 잠시 나의 착각이었다. 더 큰 짐을 다시 짊어지게 된 것을 잠시 잊었었다.
사무실로 올라와 정신줄을 부여잡고 스케줄을 확인했다. 빈틈없이 이번 달 달력을 꽉 채우고 있다. 일단 이번 달은 준비만 해두면 되니, 답사 다녀올 며칠만이 필요했다. 몇 개의 일정을 잡아서 드래그한 후, 다른 날짜로 옮기기 시작했다. 몇 차례 마우스가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겨우 이틀을 비워냈다. 마우스가 멈추기가 무섭게 시현에게 메시지가 왔다.
"언제 갈까? 우리 답사 가는 날 정했어?"
성격 급한 건 나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다음 주 수요일 이후에 괜찮을 것 같아, 그때까지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좋아 나는 네 시간에 맞출게"
"너무 잘 됐지 뭐니!"
시현은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모르겠지만 흥분되는 건 나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내가 흥분되는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이번에도 나에겐 또 다른 소기의 목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순천만 갯벌 복원은 이제 500m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갯벌의 소중함을 잘 인지하지 못했던 시절, 전국적으로 벌어진 개간으로 자연의 생태가 훼손되기에 이르렀죠."
"이제 이를 되돌려 역간척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순천 갯벌 복원 사업 2.1km가 모두 마무리될 때 즈음이면 내 나이가 서른 하고도 둘 셋은 될 것이다. 앞으로 삼사 년은 더 쏟아야 갯벌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생태계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온전히 복원되겠지만 말이다.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태한의 짧은 브리핑이 끝나고 나는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 이제 곧 이십 대의 종지부를 찍고 삼십 대 초반으로 넘어가려는 나 자신의 현 상태를 돌아봤다. 왠지 이 갯벌 복원이 모두 끝날 때 즈음에는 나도 뭔가 원래의 나를 되찾아야 할 것만 같은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 일환으로 나의 이십 대가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낸 버킷 리스트 중에 가장 미련이 남아있는 한 줄이 눈길을 멈추게 했다. 어린 시절 남해에서 보았던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그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었다.희주의 팔찌만큼이나 오래 묵은 아련한 기억이지만 내겐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야 한다. 만약 그러기 전에 내가 삼십 대를 맞이한다면 난 나 자신을 원망하며 살 것이다. 게다가 어렸을 때 한 번 본 게 전부인 남자아이를 삼십 대가 되어서 찾아다닌다고 하면 남자친구 은유조차도 혀를 끌끌 차며 힐난을 쏟아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미련스러운 년으로 보이기 싫어서 빠른 시일 내에 성공적인 결혼을 완결 지어 확인시켜주려 할 것이다. 난 너무 멀쩡하다고 증명하듯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행여 현 남자친구가 '넌 아니야'라고 거절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남들 하는 것처럼 소개팅이나 맞선을 통해, 아니면 결혼정보회사 가입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결혼까지도. 나란 사람은 그렇다. 웬만한 일에는 미친년처럼 달려들지만 연애에는 그다지 정성을 들이지 않는 나 자신을 잘 알기에 이런 상상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욕을 먹어도 지금 이십 대에 먹는 게 덜 쓰지 않겠냐는 것을 변명 삼아 다시금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잘 다녀오세요. 근데 순천이면 거의 땅 끝 아닌가?"
"준비는 알아서 잘하셨을 테니 뭐 챙겨드릴 건 없을 것 같네요"
점점 뚱뚱해져 가는 나의 가방을 보는 태한의 얼굴에는 걱정의 눈빛보다는 왠지 신이 난 듯 미소가 퍼져있었다. 이 양반은 뭐 때문에 신이 났을까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애먼 가방만 꾹꾹 눌렀다.
"휴대전화 메모리는 정리 좀 하셨죠? 영상이랑 사진 많이 찍어오셔야 되니깐~"
"아 그리고 오실 때 제 선물 잊지 마세요."
"선물 같은... 내가 놀러 가냐? 나 대신 회사나 잘 지키고 있어요. 딴짓 좀 그만하시고!"
이를 꽉 물고 눈으로는 웃으며 가방을 재차 확인했다. 태한이 예약해 준 기차 시간을 한 시간 남짓 남겨두고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앱을 열어 출발 시간을 확인하고는 택시를 불렀다. 시간이 맞았으면 시현과 함께 동승했을 텐데. 각자 움직이기로 했다. 저녁 즈음에나 봐서 같이 미팅 겸 식사를 하기로 했다.
습한 날씨 탓에 용산역에 내려 오르락내리락하느라 금세 또 땀이 흘렀다. 에어컨 바람으로 땀에 젖은 목덜미를 덮고 있는 머리를 옆으로 뉘며 말렸다. KTX의 차갑지 않은 온도가 적절한 쾌적함을 주고 있다. 혼자서 순천행 기차를 타는 것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기도 했고 역방향 좌석이라 그 어색함이 배로 커지는 것만 같았다. 자리를 바꾸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그냥 앉기로 했다. 생각 없이 기차 예약을 태한에게 맡긴 내 잘못을 탓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