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저 수풀만 지나면 언덕 끝에 다다른다. 이제 곧 볼 수 있다. 누군지 알게 될 것이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콩닥거리게 만드는 건 설렘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닥쳐온 어둠이었다. 올라올 때만 해도 노을이 길을 밝혀 줬는데, 금세 하늘이 검푸른 색을 띠었고 땅은 더 짙은 검은색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아직 조금 남았는데 계속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뒤를 돌아보니 마을 불빛 만이 저만치 내려다 보이고, 그 외에는 컴컴한 어둠뿐이다. 더 나아가기엔 앞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고, 그냥 돌아가자니 너무 허탈하고 아쉬웠다. 갑자기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 않고 서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때 바로 코앞까지 그 실루엣이 다가와 있었다.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쏘는 강렬한 플래시 빛으로 생긴 내 그림자가 눈앞의 실루엣을 덮었다. 그림자 때문에 바로 내 눈앞에 멈춰 선 실루엣의 정체가 가려졌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강한 플래시 빛에 반가움보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플래시로 내 얼굴을 똑바로 비추었다가는 서서히 땅 쪽으로 내렸다. 플래시가 아래로 향하자 어둠 너머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등을 돌려 그 실루엣으로 한 발짝 다가가 한 쌍의 팔찌 중 하나를 풀러 그의 손에 쥐여줬다. 순간적이지만 무언가 증표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내게 가진 것이 없었고 주머니 속의 비즈팔찌뿐이었다.
외할머니 집에만 오면 어찌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서울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수박을 손에 들고 있는 내 표정은 첫날 내려올 때의 설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축 처진 모습이다. 물론 가기 싫어서 기분이 가라앉은 것도 있지마는 친구들과 어색함을 마저 풀지 못해서 더욱 그랬다. 친구 희주는 떠나는 내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 저녁 왕소라를 찾으러 갯바위에 내려갔을 때, 동수의 왕소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곳에서 뭔가 다른 걸 찾았다. 바로 희주의 팔찌였다. 잠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빠가 생일선물로 사준 비즈팔찌를 잃어버렸다고 울먹거리던 희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거라도 주웠으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려는 순간 바로 그 불투명한 실루엣을 보게 되었고, 눈앞까지 다가온 실루엣에게 급한 나머지 그중 하나를 떼어 넘겨주고 만 것이다. 그리고 어둑해진 산기슭에서 나를 비추던 플래시의 주인공인 외할머니 손을 잡고 겨우 마을로 내려올 수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실루엣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 한 아쉬움이 자꾸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아침부터 서둘러야 오후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데 어제 잠을 설쳐서인지 그만 늦잠을 잤다. 헐레벌떡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그 와중에 할머니는 수박 한쪽 먹고 가라며 은쟁반에 사분의 일 쪽짜리 수박을 잘게 썰어 오셨다. 안 그래도 늦었다고 어린 투정을 부리며 억지로 하나를 집어 들고는 바로 출발했다.
남해읍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 창밖으로 빗방울이 하나 둘 맺히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순천역에 도착할 즈음에 갑자기 번개가 빠지직하며 어두운 하늘을 가르더니 곧 천둥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려왔다. 문득 희주의 마지막 표정이 생각나면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올라가기 전에만 주면 되겠지'하고 미루어 두었던 희주의 팔찌를 돌려주지 못하고 그냥 와 버린 것이다.
'이걸 어쩌지'
'다시 돌아가야 하나, 전화를 해둘까'
어린 나는 매우 난감했다. 사실 더 난감한 것은 한 쌍의 팔찌 중 하나는 사라지고 남은 하나만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한 짝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니 이건 내가 찾아준 게 맞는 건지 오히려 오해를 살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아니 내가 뭐 잘 못한 것도 아닌데 이럴 것까지야'
'찜찜하긴 한데 뭐 나중에 돌려주면 되지'
희주의 잃어버린 팔찌는 다시 주섬주섬 내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비가 점점 심상치 않게 많이 내리나 싶더니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폭우로 인해 열차는 잠시 우리 역에 3분간 정차할 예정입니다"
지하철 문이 열려있는 덕분에 기댈 곳이 없어진 나는 멍하니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 보이는 플랫폼 의자에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을 마주했다. 어릴 적 나의 눈망울을 닮은 소녀를 뒤로하고 지하철 객실을 벗어나 플랫폼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혹시, 시현?"
"어랏, 이게 누꼬, 수빈이 아이가! 전혀 몰라 보겠다. 너!"
"너가 뭐냐, 내가 한 살 언니거든!"
"훗, 너 빠른인거 다 알거든, 언니는 무슨! "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한 사오 년 된 것 같네, 못 본 지..."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하던 고향 친구들의 만남이 뜸해진 게 벌써 4년이나 되었다. 한창 열정이 넘치는 광고기획사 초보 카피라이터 3년 차를 벗어난 그때의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였다. 이렇게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 친구 시현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된 현재의 내가 대견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서울물 먹어서 다소 달라진 내 얼굴을 첫눈에 알아보진 못했다. 달라지기 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도록 남해 시절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시현은 대학시절 여행 동아리 경험을 살려 저가 항공사 티켓 예약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곧 있을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 관련 준비를 위해 답사를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이번에 '기후변화 시리즈' 중 '사라지는 갯벌'을 다루는 홍보물에 참여 중이었다. 거기에 순천만 갯벌 복원 2.1km 사업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우연히도 서로 다른 목적으로 순천에 내려갈 참이었다. 마침 회사도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둘은 그 자리에서 점심 약속을 잡았다.
'오늘 점심은 돈가스 어때요?'
어김없이 올라오는 단체방 메시지가 점심시간 30분 전임을 알린다.
'맛있게 드세요. 저는 따로 먹을게요'
재빨리 한 마디 남기고 시현을 만나기 위해 클러치만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럴 땐 참 요긴한 알람이 되기도 하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사무실 책상 서랍의 맨 위 칸 구석의 작은 종이 박스에는 어렸을 때 주웠던, 아직도 되돌려 주지 못한 희주의 팔찌 하나가 들어있다. 언젠가 만나면 되돌려 줘야지 했었는데, 일 년에 한두 번 만날 때마다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또 한 건망증 하는 아이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내가 갖고 있었다고 갑자기 털어놓기도 머쓱해서 옛날 얘기만 나오면 나는 오히려 피하기만 하고 현실 고민으로 주제를 바꾸곤 했었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연락도 없이 흘러가버려 현재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내 방 책상 속 서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이 박스를 사무실 서랍으로 이동시켜 항시 대기 중인 상태로 만들어 두었다. 오늘은 나답지 않게 잊어버리지 않고 상자 속 팔찌를 꺼내어 클러치에 넣어두었다. 왠지 나보다는 희주와 자주 만나고 있던 시현을 통해서 전달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마침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