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럽기는 희주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웃으려 애쓰던 희주 역시 급 우울해하며 금방이라도 울듯이 남겨진 동수의 소라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그나마 이성적인 시현이 토닥이며 올라가자 했다. 시현과 희주가 거의 친자매처럼 친했기 때문에 그나마 나를 대신해 위로해 줄 수 있었다. 명희는 건장한 팔뚝을 자랑하며 나머지 소라를 담은 어망을 짊어지고특유의 밝은 톤을 살려서 외쳤다.
"자, 올라가서 같이 구워 먹자"
혼자 그렇게 즐거워하는 게 오히려 부러웠다. 뭔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죄인이 된 것처럼 난처해하며 걸어 올라가는 다른 이들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갈 때와는 달리 터벅터벅 걸어오는 맨발의 나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는 할머니의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부지깽이를 든 구부정한 할머니의 자태가 조금씩 또렷해져 가고 있었다.
저녁밥 지을 즈음이나 피우는 불을 손녀를 위해 오전부터 쓸모없이 지펴 내고 계셨다. 아궁이의 달궈진 숯을 옮겨 놓으면 바로 화로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 위에 은근하게 구워 먹는 소라가 그야말로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결국 방구들에 불을 넣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고 무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면서 빈 손을 할머니 눈앞에 내보였다. 할머니는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이자 밭일 하러 갈라카네”
"고고매랑 삶아 놨으니께 묵고 그래라~"
빈손으로 돌아온 손녀는 달래주지 않고 돌아서는 무심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다 한 마디 했다.
"어디 가는데?"
"나도 따라갈래~!"
부지깽이를 끌고 부엌으로 들어가 지펴놓은 불씨를 정리하고는 각종 도구들이 담긴 바구니를 들쳐 매고 집을 나서신다.
"아이고 더바서 니는 모단다. 멀기도 마이 멀데이"
"아야, 얼능 댕기올끼~"
나도 갈 수 있는데, 왜 맨날 안 데리고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혼자 남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툇마루에 누워 하늘에 걸쳐 잠시 지나가다 멈춘 구름과 대화하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바다 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너희들은 어디로 가는 중이니?"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야, 갈 수 있는 데까지..."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간다고?"
"응, 가다 보면 또 다른 구름들도 만나고, 또 헤어지고, 흩어지고 그래"
"그렇구나, 심심하진 않겠네."
"심심할 틈이 없긴 하지, 바다 위로 흘러가다가 또 산머루에 머물기도 하고, 심심하면 비를 뿌리기도 하니까"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계속해서 말을 걸며 귀찮게 하자, 슬슬 바람이 불어와 구름을 밀어낸다. 내 말을 안 받아주는 구름들도 보내주고, 천천히 높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어진 시선은 고개를 젖혀 처마 안쪽에 집을 지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비 한 쌍이 앉아 있는 전깃줄 위에서 멈췄다. 계속 더 위로, 아니 그 뒤로 고개를 젖혀 천정 서까래 안쪽 전깃줄이 연결된 하얀 애자들 사이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거미와 눈이 마주쳤다. 줄을 타고 내려오다 말고 내게 말을 건넸다.
'넌 어디서 왔니?'
내게 묻는 것만 같은 거미의 엉거주춤한 동작에
'여기가 원래 우리 집인데, 너야말로 지금 어디서 오는 거냐!'
거미를 상대로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뒤로 젖혀진 고개가 마루에 닿을 만큼 가까워질 무렵 거미는 잽싸게 줄을 다시 감아서 천정 위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거미를 쳐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거미가 내려오면 손님이 온다는데, 누가 오려나?'
늘 할머니가 하던 말을 내가 무심코 따라 하고 있다. 불안 반 기대 반, 반가웠던 거미와의 대면식을 나눈 뒤 서서히 뒤통수가 마룻바닥에 닿으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릎을 스치는 거친 마찰에 깜짝 놀라 허우적대며 일어났다. 거미가 내 무릎에 기어 다니는 줄 알고 소름이 끼쳤다. 거미를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내 몸에 뭔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거미는 온데간데없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할머니의 흙 묻은 손이 내 무릎을 비비고 있었다. 거미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괜히 할머니에게 투덜거렸다.
이제 진짜 저녁을 짓기 위해 다시 불 지피기에 나선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조각 하나로 나만의 불쏘시개를 만들어서 함께 뒤적거렸다. 뻘건 불씨들이 올라오며 회오리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회오리 형상이 자연스럽게 휘감기며 소라 형상을 그려냈다. 그 순간 문득 갯바위에 두고 온 동수가 잡은 왕소라가 생각났다. 불쏘시개를 던져놓고는 내달려 갯바위로 향했다.
아궁이 열기에 달궈져 빨개진 나의 볼살이 하얗게 식어갈 무렵 갯바위에 다다랐다. 반대로 식어진 태양은 오히려 하늘 끝에 걸쳐져 수평선 위를 벌겋게 달구고 있는 찰나였다. 그때 논을 가로질러 있는 언덕 끝자락 바위에서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역광인 탓에 누구인지 알아챌 수 없었지만 사람 형상이었다. 또래 남자아이의 형상이었는데, 이제껏 본 적 없는 형상에 놀라 멈추었다. 남자아이는 모두 내 동생뻘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이 마을에서 전혀 본 적 없는 실루엣이 눈에 걸쳐졌기 때문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가신 성격을 보여줄 기세로 계단식으로 지어진 다랭이 논두렁을 타고 지그재그로 무작정 뛰어 올라갔다. 잡초가 무성해서 길조차 가늠이 잘 안 되었지만 매일 다니던 길이라 본능적으로 발이 움직였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는 논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모습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마을을 돌아서 나갔다가 다른 골목으로 올라가야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손에 잡힐 듯한 가까운 거리지만 가는 길은 험난했다. 숨소리라도 들릴까 봐 입을 막고 일단 계속 지켜봤다.
그 아이 역시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바위에 걸터앉았다. 난 이때다 싶어 논을 가로질러 마을 골목을 향해 뛰었다. 중간에 있는 숲과 나무들 때문에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였다를 반복하며 애를 태웠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계속 뛰어 마을을 돌아 큰 골목길로 나갔다. 이제 다시 다음 골목으로 돌아서 산비탈만 오르면 그 바위가 있는 언덕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제 한 길밖에 없기 때문에 무조건 그 아이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며 살짝 안도했다.
숨을 잠시 가다듬기 위해 발걸음을 늦췄다. 이제 막다른 골목이라는 생각에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그냥 내가 다 오를 때까지 거기에 그대로 있었으면 했다. 내려오다가 서로 마주치면 매우 난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면 실망할 것 같았고, 모르는 사람이면 좀 무서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난 미지의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을 더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