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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낱낱 Aug 09. 2024

잠수는 못 참지

'남해소년' 2화

창밖의 풍경은 그렇게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건 단지 내가 역방향 좌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폰 줄을 잡고 있는 작은 손 그리고 또 다른 한 손에 쥐어진 ‘순천행’이라는 목적지가 적힌 기차표를 여 승무원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 너무 오랜 시간 의자 위로 둥둥 떠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짧은 다리 때문에 발이 너무 저려왔다.


가방을 들쳐 매고 열차의 출구 계단 앞까지 쩔뚝거리는 발을 대신해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여 승무원은 환한 미소로 어린 나를 배웅한다. 겸연쩍은 짧은 미소로 화답하고는 출구 방향으로 냅다 달렸다. 헐떡이는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제 잠들지 않으리 다짐하며 섬나라 남해도를 향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꾸벅꾸벅 졸음을 참으며 어둑해진 바닷가를 마주한 건 남해대교를 건너갈 즈음이었다. 장장 네 시간 가까이를 버스에 의지해 달려 남해읍 터미널에 도착하니 언제부터 나와서 기다렸는지 알 수 없지만, 하회탈 같은 얼굴을 한 외할머니의 손짓이 어린 손주를 반긴다.


"아이고 억쑤로 커뿌렀네, 우리 똥강세이"


6개월 만에 보는 할머니의 첫마디에 나는 신고 있던 신발을 내려다보며 답을 했다.


"키는 모르겠고, 발은 엄청 커졌어!"

"운동화 이쁘지? 새로 사줬어 엄마가"


키 크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나의 새 운동화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만 한가득 있었다.


"허따 수지맞았구마, 할매 끼는 엄나?"


"할머니 거는 여기, 사탕!"


서울에서부터 애지중지 갖고 내려온 검은 봉지를 내밀며 나는 매우 뿌듯해했다. 할머니는 봉지를 받아 들고 한 손은 내 손을 잡고는 다음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외갓집이 있는 다랭이마을까지 향하던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나는 외할머니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동네와 가까워지는 언덕을 넘어서자 마을의 불빛들과 차곡차곡 쌓인 케이크 모양을 한, 계단식 논이 달빛에 드러나며 함께 놀던 친구들, 동생들이 뛰어나올 것 만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달콤한 기대와 달리 고요하기만 한 골목을 지나 할머니 집 마당에 들어서자, 바닷가 멀리 보이는 섬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어선의 불빛만이 긴 여정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누군가의 손끝이 새시 위에 덧댄 창살문을 두드리며 아침잠을 깨운다. 처마 끝이 햇살을 반쯤 가려 얼굴을 감추고 있는 그림자 때문에 고개는 고정된 채로 간신히 한쪽 눈꺼풀을 열어 새까만 눈동자만 돌려 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역광을 받으며 손짓하는 소녀가 작은 눈에 들어왔다.


실루엣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단짝 동갑 친구 희주였다. 다랭이 마을에서 말썽으로는 최고로 치는 우리 둘은 이 동네에서 유별난 동갑내기였다. 중학생만 되어도 읍내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언니, 오빠들이 대다수여서 남아있는 아이들 중에는 6학년이 대체로 최고 어른인 셈인데, 우리는 이곳 아이들 세계에서는 꽤나 어른인 셈이었다.


희주는 음영을 뚫고 얼굴을 들이밀며 나의 발바닥을 간지럽혀왔다. 잠을 깨우는 간지럽힘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아당긴다.


"야, 너 누구야"


"으악, 내 신발, 어떡해"


툇마루에 걸쳐있던 희주는 신발을 그대로 신은 채로 이불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뭘 어떡해 최희주, 너 이제 우리 할머니한테 혼났다"


엉망이 된 흑 은 방바닥을 손으로 대충 한 번 쓱 밀어내고는 헝클어진 긴 머리를 한 우리 둘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희주는 대문을 지나쳐 마을 아래 골목길을 헤집고 내려갔다.


"야, 너 거기 안서"


"잡을 테면 잡아봐, 나 잡으면 너한테 언니라고 부를게"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인 채로 나의 발바닥은 흙을 스치듯 달려가 희주를 쫒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다. 어느새 갯바위까지 도달하고는 새하얀 파도의 부서짐에 잠시 멈칫했다. 둘의 짧은 눈 맞춤을 끝내기가 무섭게 희주가 먼저 뛰어들었다. 뒤질 새라 바로 그녀가 뛰어들어 거품이 일렁이는 지점을 향해 똑같은 곳으로 망설임 없이 그대로 몸을 던진다. 긴 머리가 파도와 함께 흐트러지며 시야를 흔든다.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더 깊은 곳으로 도망가듯 빠르게 잠수하는 희주. 그 뒤로 세찬 발장구를 치며 쫓아가 본다. 잡힐 듯한 그녀의 발가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재빨리 물 밖으로 나와 바다 위에 둥둥 떠서 거친 숨을 고르는 동안 희주는 계속 잠수 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해진 바다 수면 위로 그녀의 주먹 쥔 손이 튀어 올랐다.


"이거 내 선물!"


"우와, 진짜 크다"


"뭐 이 정도 가지고"


"나 몰라? 내가 다랭이 마을 잠수왕 최희주라고! 하하"


주먹을 펴 아기손 같은 토실토실한 손가락 사이로 커다란 소라 하나를 건넨다. 손가락 다섯 개를 다 펼쳐서 희주가 잡아온 소라를 받았다. 우리는 이걸 '주먹소라'라고 불렀다. 꽉 쥐어도 간신히 잡힐까 말까 하는 어린 손안에 있는 거대한 크기에 놀랐다. 한 손으로 헤엄쳐 뭍으로 올라가 바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풍덩 빠져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풍덩풍덩 소리가 먹먹하지만 정확히 들려왔다. 물거품을 일으키며 발가락 여럿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바로 뒤뜰 너머 윗집의 동수, 마을 입구 이팝나무 옆 가장 오래된  집에 사는 명희, 바닷가에 가장 가까운 언덕 위의 집에 사는 시현까지 또래 친구들 모두 내려온 것 같다. 희주가 잡은 거대 소라를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더 큰 소라를 잡겠다고 뛰어들었다.


그중 잠수 실력은 단연 희주가 뛰어났다. 여기에 살 적만 해도 내가 그 뒤를 따라 2등이었는데 지금은 제일 꼴찌로 밀려나 있다. 내 밑을 받쳐주던 나머지 친구들도 이미 잠수 실력이 나를 능가했다. 하지만 소라를 찾는 눈썰미와 감각은 명희가 최고였다. 한 살 아래의 동생이지만 체격이 우리 중에 가장 컸으며,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그야말로 수영 선수 같은 골격까지 몸 하나는 타고난 아이였다.


한 무더기의 소라가 갯바위 위에 쌓여갈 무렵 난 이미 지쳐서 구경꾼 신세가 되었다. 각자 잡은 소라 중에 제일 큰 소라만 따로 두었는데, 아직까지 처음 잡은 희주의 소라를 넘어선 것이 없었다.

모양도 제각각인 소라와 고둥을 보며 각자 잡아온 것들 앞에 자리 잡았다.


"내가 잡은 게 제일 크네"


우기는 동수 옆에는


"그건 내 거야!"


또 우기는 시현,


"아니 무슨 소리야"


희주도 자기가 잡은 걸 치켜들며 외쳤다.


내가 보기엔 아주 미세한 차이로 동수의 것이 가장 큰 것 같아 보여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수께 크긴 크네"


그렇게 아웅다웅 대다 말지 싶었는데 목소리가 커지고 다툼이 벌어졌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라를 하나 집어서 바다로 던졌다. 다름 아닌 희주의 소라였다. 동수는 싸우는 게 싫었는지 아니면 지는 게 싫었는지 희주 앞에 놓인 소라를 눈앞에서 없애버렸다. 순간 당황한 모두에게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이내 희주는 밝은 목소리로 과장되게 크게 웃으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애써 그냥 넘기려 하였다


"그래 네 거가 제일 크다 동수야!"


동수는 그런 동정 비슷한 말투에 더 씩씩대며 흥분을 멈추지 않았다.


"됐어, 갈래.”


그렇게 자기가 잡아 온 소라는 그대로 버려두고 동수는 뛰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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