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 온도보다 낮게 설정된 지하철 객실 온도는 추위에 민감한 나에게 늘 여름 감기를 안겨다 준다. 그래서 나는 항상 카디건을 챙긴다. 간신히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 내가 불안해진 이유는 바로 그 카디건을 빠뜨리고 허겁지겁 나왔기 때문이다.
항상 뭔가 하나를 빠뜨리고 나온다. 어느 날은 머리끈을, 어느 날은 이어폰을, 어느 날은 지갑을 통째로. 난 스스로를 매우 침착하고 차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꼭 이렇게 하나씩 빠뜨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침 남자 친구 은유의 비난 섞인 출근길 안부 메시지가 날아온다.
'또 감기 걸렸다고 징징대겠구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다 챙기고 다니다 보니 빠뜨리는 게 생기는 거라고'
'그래서 그 무거운 가방을 매일 짊어지고 다니는 거지?'
은유는 내 앞날이 걱정된다는 말과 함께 나에겐 비아냥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문자들을 찍어댄다. 속으로는 동의하지만 내 손가락 타이핑은 매우 삐뚤어지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매고 다닐 것도 아니면서 뭔 걱정이람!'
잦은 건망증에 대한 자책을 늘이기보다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한다는 준비성에 자부를 갖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이라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뒤통수와 목덜미 사이로 차갑게 스치는 지하철 객실 천정의 송풍구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은 360도 회전하며 나를 위협한다. 그 기운이 나에게 돌아오는 타이밍이 될 때마다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애써 딴생각을 한다는 것이 어제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 떠올려졌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마감이 다가오면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부장은 끊임없이 수정 사항을 지시하고, 팀원들은 각자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나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오늘 점심은 뭘 먹지’
사치스러운 또 다른 류의 질문이 단체방을 두드리는 걸 보니 벌써 점심시간인가 보다. 분별이 확실한 그들과 달리 점심시간이 되어도 나는 일의 연속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식욕이 다 뭐지? 머릿속은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또 어떤 공격을 방어하면서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더 강해진 나의 방어력을 내일 또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이 절실했다.
오후, 부서 내 회의에서는 부장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여지없이 들려왔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 다시 해봐."
“이건 좀 애매한데, 요즘 많이들 하는 거 있잖아, 레퍼런스 좀 찾아봤어?”
“이따 6시에 전체 팀원들 다 들어오라고 해. 회의 좀 하자고”
왜 맨날 6시에 회의를 잡는 건지, 내일 오전에 잡거나 하면 준비라도 더 하던가 하지, 벌써 3시가 다 되었는데 뭘 더 하냔 말이지. 퇴근 시간은 왜 정해놓은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팀장들 회의도 아니고 팀원들까지 죄다 들어오라는 건 완전 날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이런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혹시나 했던 오후 6시의 회의에서도 역시나 결론 없이 끝이 났다. 회의는 정말 말 그대로 회의적이었다. 난 누구를 책망할 겨를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얼마 전 그만둔 팀장님을 대신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잠시 팀장 대행을 맡게 되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한 짐을 보태는 영업 팀장의 메신저 알림이 나를 반긴 시각은 야근으로 인정받는 최소 시각인 저녁 9시 즈음이었다.
'내가 오전에 보낸 메일은 확인하셨나요?'
메시지를 보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아, 이거 이러면 정말 안되는데"
늦은 식사를 하고 돌아온 옆자리 동료 태한이 나를 대신해 중얼거리는 듯했다. 의자를 15도 젖히고 등을 기대어 앉아 컴퓨터 모니터에 PPT를 켜놓은 채로 여태껏 손안에 있는 핸드폰을 주시하며 하는 소리다. 이 시각에도 여전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숫자들과 그래프가 동시에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아 코인창인 것 같은데, 뭐가 이러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생겼나 보다.
낮에는 주식창, 밤에는 코인창. 그럴 거면 집에나 가지 왜 저러고 있나 하는 생각도 잠시, '나야말로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푸념을 속으로 삼키며, 받은 메일함을 다시 뒤적이는 내 손가락은 마우스를 연신 긁어내리고 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고, 책상에 기대어 모니터를 째려본다. 잠시 없었으면 하고 기대했던 메일을 찾고서 내용을 빠르게 훑어봤다.
'내일 오후에 클라이언트와 회의가 있으니 오늘 퇴근 전에 시안을 넘겨주세요.'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의 메일이다. 하지만 아직 카피가 다 완성이 안된 상태다. 심장이 쫄깃쫄깃 해지면서 숨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10여 분간의 시간이 흐른 뒤 메신저 창을 열고 매우 담대한 어투로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일을 지금 봐서 오늘은 못 보내드리겠어요”
“죄송합니다”
아무런 답이 없이 숫자 1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분명 퇴근했을 것이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재차 독촉도 없이 퇴근한 걸 보면 내일 아침에 보내도 되겠네. 그럼 그럼, 내일 아침에 한 마디 하면, 내 기꺼이 웃으면서 들어주리라 마음속으로 주절대며 스스로 그럴듯한 방어선을 미리 구축해 두고는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오늘 할 일을 다 마친 시간에 퇴근하는 것이 정시퇴근입니다’라고 적힌 엘리베이터 문짝에 붙어있는 표어같이 생긴 녀석이 왠지 뜨끔하면서도 눈에 매우 거슬렸다. 시간을 넘겨버린 저녁 끼니를 텀블러에 남은 아메리카노 한 모금으로 달래며 지하철 손잡이와 문짝 사이에 몸을 기댄다.
한 손으로는 지하철 손잡이를, 또 다른 한 손에는 엄마의 손이 잡혀있는 대여섯 살배기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동그랗다 못해 만화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의 내 얼굴이 겹쳐졌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서 항상 졸리냐는 소릴 듣곤 했던 내 모습과는 딴판이지만 그 맑은 눈동자는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크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며, 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던 철없던 시절의 내가 보였다. 하지만 현실의 어른이 된 나의 삶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정차했던 기차가 출발하고 창밖을 바라보니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기차의 규칙적인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어느새 아산역을 지나고 있다. 딱 거기까지만 기억이 난다. 다음 정차역을 소개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사람들의 말소리조차 울리지 않도록 방음이 잘 된 고요한 객실의 좌석에서 내 몸이 깨어난 건 철로 사이의 간격을 건널 때마다 나는 괘도의 덜컹이는 진동때문이었다. 이 덜컹거림은 외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 탈 수 있었던, 지금의 KTX에 비하면 정감 넘치는 무궁화호 열차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맥박 소리 비슷한 그것이었다.
방송 속에서 여인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번 정차할 역은 순천역'이라는 떨리는 목소리가 전달된다. 놀란 가슴에 고개를 갑자기 들자 내 귓바퀴 끝에 살짝 걸쳐 있던 이어폰이 내 귓바퀴를 벗어나 마치 슬로 모션처럼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나의 탁월한 순발력으로 한 손을 쭉 아래로 뻗어 낚아챘다. 아니, 낚아채는 손은 허공을 가로질렀고, 이어폰은 그대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줄에 동동 매달려 팔걸이에 걸쳐져 있다. '웬 구닥다리 와이어 이어폰이냔 말이지’ 하며 의아해할 틈도 없이, 내 작은 손에 쥐어진 MP3 플레이어를 보고는 난 놀라지도 못하고, 앞에 마주 보고 앉은 긴 생머리 언니의 머릿결이 유난히 반질거린다는 사실에 감탄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탄 기차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