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낱낱 Aug 19. 2024

술래 잡기

'남해소년' 11화

"시원하게 수박 좀 무거 봐라"


"맹희가 너 멕이라고 꺼내놓고 갔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늘 썰어주시던 손잡이 달린 수박은 아니었지만, 그 달콤한 향은 여전히 내 코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90세가 가까이 된 어르신이 곱게 수놓은 꽃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진 은쟁반 위에 정성스레 뉘어 내오신 수박이다. 그래도 한입 물어 입안에 넣고 나니 머리끝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말도 나오지 않아 할머니를 쳐다보며 억지웃음으로라도 수박 맛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애쓸 뿐이었다.


"됐다 마. 푹 쉬레이~"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한마디 하시고는 돌아서서 빨래를 널고 계셨다. 할머니의 총천연색 몸뻬 바지는 바다를 향해 펄럭이며 춤을 추고 있었고, 현란한 춤사위로 인해 최면에 걸린 나는 또다시 눈이 감기려 하고 있었다.


'답사는 잘 끝났어?'


'올라오는 중이야?'


'어딘데? 아직 안 올라온 거지?'


'밥은 먹었나?'


'연락이 안 되네... 자고 있나 보네?'


밤사이 나의 무소식에 문자가 여럿 쌓여있었다. 모두 은유의 문자였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기울여 세워놓고 눈으로만 읽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타이핑할 기운이 없었다. 이럴 땐 내 생각을 그대로 작성해 주는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쌓아 올려진 이불에 기대어 수박으로 수분과 당분을 충전한 후 기운을 조금 내어 손을 뻗었지만, 휴대전화 화면에 도달하기도 전에 결국 다시 눈이 감겼다.





'희주를 만나야 해'


남우는 결국 희주를 만났다. 양재동의 교육문화회관에서 연수를 마치고, 강연을 준비해 준 관계자와 짧은 티타임이 있었다. 수료증을 받기 위해 접견실로 사람들이 모일 예정이어서 빨리 가서 먼저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지막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연장에서 나왔다.


"연남우님? 지역이 어디시죠?"


"아, 저는 경남이요."


"경남이요? 경남 어딘데요?"


"남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 얼마 전까지는 저도 서울에 있었고요!"


최근 남우는 배구부 친구에게 수소문하여 팔찌의 주인을 이미 찾아내었다. 내가 갖고 있던 팔찌에는 없던 H.J라는 이니셜이 눈에 보일랑 말랑하게 남우가 갖고 있던 것에는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다랭이 마을에 사는 몇 안 되는 아이 중에서 그 이니셜을 가진 6학년 또래의 여자아이를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단지 시기가 너무 늦었을 뿐. 이제는 그 아이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두 알아냈고 남은 건 직접 연락을 취하는 일뿐이었지만 남우는 망설이고 있던 차였다.


"최희주... 매니저님?'


"네, 최희주라고 합니다. 저도 실은 남해에서 어렸을 때 잠시 살았거든요. 하하, 반갑네요~"


접견실에 있던 관계자는 남해라는 얘기를 듣고 동향이라며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 명함에는 놀랍게도 최희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남우는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꺼내 저장된 연락처 목록에서 최희주라는 이름을 검색하여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명함의 번호와 일치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놀라움에 입을 틀어막았다.


팔찌의 주인, 그 아이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교사 및 공무원 교육을 담당하는 매니저가 되어있을 줄은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명함과 전화앱 사이로 눈알을 굴리는 남우를 노려보며 희주가 한마디 하였다.


"왜요? 제 명함에 무슨 문제라도? 설마 전화해서 확인해 보려고요?"


"아니, 그게 아니고..."


"아휴 참. 진짜 제 번호예요. 아니 명함 전화번호를 사기치겠어요? 하하."


"뭐 따로 전화하실 일도 없긴 할 텐데..."


"아니, 그게 아니고요."


주머니 속 팔찌를 집으려 손을 넣으려는 순간 강연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무섭게 들이닥쳤다. 너나 할 것 없이 수료증 내놓으라며 달려왔고, 순식간에 그녀는 사람들로 둘러싸였다. 너무 갑자기 닥친 상황에 당황하여 미리 받아둔 수료증만 챙겨서 인사도 못하고 접견실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어떤 아이한테서 이걸 받았었다는 거죠?


"네, 그 아이가 희주 씨는 아닌가 보네요?"


남우가 희주를 다시 만난 건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수료증에 이름이 잘 못 적혀있다고 우겨서 겨우 짧은 시간 약속을 얻어냈다. 그녀의 사무실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다시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희주의 왼쪽 팔목에는 시현에게서 전해 받은 팔찌 하나가 이미 채워져 있었고 남우는 그와 똑같은 하나의 팔찌를 꺼내어 그녀의 팔목에 갖다 대었다. 되돌려준 팔찌를 마저 끼운 희주의 팔목은 드디어 한 쌍의 팔찌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갑작스레 잃어버렸던 나머지 팔찌 하나를 눈앞에 내놓는 낯선 남우를 마주한 희주는 당황스러움에 몸이 떨렸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소중한 물건을 이렇게 십여 년 만에 찾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냥 기뻐할 수만 없었던 것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아빠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희주는 자기 팔찌가 맞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준 적은 없다고 했다. 수빈이라는 친구가 찾아서 갖고 있던 것을 최근에 돌려 받긴 했는데, 혹시 어렸을 적 만났다는 그 아이가 수빈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남우에게 전했다. 남우는 이제야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랬던 거군요. 수빈 씨는 지금 어디 있죠?"


"글쎄요..."


그때 동생 선화에게서 느닷없이 걸려 온 전화가 주머니 속에서 울려대고 있었다. 동생의 이름이 화면에 뜬 것을 보고는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남우는 뜬금없는 오랜만의 동생 전화에 무슨 급한 일이 있으려나 싶어 진동이 열 번쯤 울리고 나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동생 선화도 다짜고짜 팔찌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오빠야, 혹시 서랍에 있던 팔찌 우쨋노?"


"그건 와 갑자기?"


"그걸 찾는 사람이 있다! 혹시 지금 가지고 있는 거 맞제?"


"아니, 지금은 없다. 주인 만나서 돌려줬다. 와 그라는데?"


명희한테서 팔찌 사연을 듣게 된 선화는 책상 서랍을 뒤져보고는 사라진 팔찌에 대해 오빠에게 확인해 보고자 전화를 했다. 그렇게 알게 된 현재 팔찌의 상태에 대해서 명희에게 바로 알려준 것이다. 바로 그 통화에서 남우는 동생 선화에게 부탁의 말을 남겼다.


"그분 이름 좀 알아봐도. 내가 쪼매 있다가 다시 연락할 끼데"


"그래, 알겠다. 내 알아볼게"






이전 10화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